4강 2:4-7 다윗의 첫 번째 통치

<본문>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더라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가로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 너희 주 사울이 죽었고 또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저희의 왕을 삼았음이니라

<설교>

지난 시간에는 여호와께 묻는 다윗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은 사무엘과 요나단이 죽은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가를 두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즉 자신에게 닥친 상황에서 행동해야 할 바를 자기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다윗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린 대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벗어날까? 아니면 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두고 궁리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다윗이 여호와께 묻는 것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까?’를 두고 묻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하나님께 묻는 것은 어색한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의 주변을 둘려 보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격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마음 깊이 깨달으십시오. 그럴 때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나 살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께 묻고자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을 증거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묻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과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 되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이야 말로 ‘유다 한 성으로 갈까요’ ‘가라’ 유다 어디로 갈까요‘ ’헤브론으로 가라‘는 다윗과 하나님의 대화에 일치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나 자신을 위해 주워진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라는 반발을 하기 보다는 ‘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압니다’라는 인정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느냐?를 따지는 것은 결국 내가 행할 수 있는 것만을 스스로 고르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복음은 그 어떤 것이든 우리의 힘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과 대치되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내 손에 있는 것은 내 소유로 여기고 내 소유된 것은 스스로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게 있는 것을 조금 떼어서 없는 사람에게 주라’는 식이 아니라 ‘네게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내 것을 네게 잠시 맡겼을 뿐이니 없는 자와 나누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본성으로 이해하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일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없다’고 반발하며 부담을 갖기 보다는 그것이 정당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갈 수 없는 인간의 악함과 연약함을 고백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곧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호와께 묻는다는 것은 날마다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묻는 다윗이 그의 첫 번째 통치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4절에 보면 유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사울을 장사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첫 번째 그의 통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을 장사한 것은 예전이 사울이 자신들을 암몬 사람의 손에서 구원해준 일과(삼상 11:6-11)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베스 사람들의 이 일이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에 대한 반역으로도 보일 수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모르면 모를까 안다면 섣불리 사울의 시신을 장사하지는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울의 시신을 장사한다는 것은 다윗의 미움을 살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누군가가 여러분과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에게 잘 대해준다면 그 사람에게까지 적대감을 가지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본성으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다면 그들에 대해 분노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가로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5-6절)라는 말로 그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첫 번째 통치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생각해 볼 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다윗이 통치하는 나라가 어떤 모습을 담고 나아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사울이라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반발을 가졌을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딸인 미갈이 사울을 속이고 다윗을 도망하게 한 일에 대해 분노한 적이 있습니다(삼상 19:17). 그리고 사울이 월삭이 되었을 때 음식을 먹는 자리에서 다윗을 죽일 계획을 세웠으나 요나단으로 인해 무산되었을 때 요나단에게 노하며 ‘패역 부도의 계집의 소생’이라고 합니다. 그때 요나단이 다윗을 변호하자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치려고 하기까지 했습니다(삼상 20:30-34). 이러한 사울에 비해 다윗은 사울을 장사한 야베스를 오히려 축복을 했다는 것은 사울이 통치한 나라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아갈 이스라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1장의 애가에서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우로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 같이 됨이로다”(21절)는 말을 합니다.

사울이 죽은 것을 사울의 방패가 버린바 된 것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사울을 곧 방패로 여기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울을 방패로 이해하다는 것은 사울의 왕으로서의 역할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고 살리기 위해 왕이 희생하고 섬겨야 하는 존재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의 역할인데 이 방패가 깨어진 것으로 슬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왕으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보여진 통치 행위가 사울처럼 자신의 원수를 도와준 자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으로서의 진정한 모습이고 역할인 것입니다.

왕으로서의 다윗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의 방패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참된 섬김과 봉사를 보여줌으로써 이스라엘의 왕다운 모습이 무엇인가를 증거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된 왕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벽하게 증거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섬김과 봉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통치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통해서 우리가 무엇에 다스림 받아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에게 다스림 받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 다스림 받으며 산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거 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어떻게 여러분을 통해 증거 되어진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주님의 섬김과 봉사를 보이는 것으로 되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우리의 악한 본성을 따라 행하는 것이 참으로 많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신 그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지 않는 것처럼, 신자된 우리 역시 하나님이 보잘것없는 우리를 신자로 세우신 그 뜻과 신자로서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은 채 다만 우리의 당리당락을 좇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처럼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울처럼 사는 것인 아닌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하며 살아가든 그것은 하나님이 신자의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 맡기신 것입니다. 이 점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 본성으로 살아서는 안되는 존재입니다. 비록 우리 모두에게는 옛 본성이 살아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주님의 섬김과 봉사 아래 다스려져야 합니다. 우리의 본성들이 악한 것임을 깨닫고 주님의 성품이 나와질 수 있기를 소원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누구에 대해서든 주님처럼 섬김과 봉사로 대하고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으로 슬퍼하고 노래하는 다윗의 그 마음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울의 죽음으로 기뻐하고 홀가분해 하면서 이제 자신이 왕이 되는 것만 남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기름 부음 받은 사울이 죽은 것으로 애통해 하는 그 마음이야 말로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사십니까? 주님의 봉사와 희생과 섬김 아래 살아가십니까?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통치를 받고 산다면 그것은 우리에게서도 주님과 동일한 마음이 보여져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는가?’라고 반발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신자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다스림에 거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의 통치의 모습이 드러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결국 우리의 악함과 못남을 생각하고 회개하고 애통해야 할 문제이지 할 수 없음을 당연하게 여기고 간과할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장소에 있는 나라로서 단지 막연하게 상상만 하는 추상적인 나라가 아니라 신자의 삶에서 보여지고 증거되어야 할 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다스리고 계심을 보지 못하십니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여러분의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 여러분 앞에 낮은 자를 세우신 일도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낮은 자를 보면서 여러분의 마음이 낮아진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이 야베스의 사람을 축복하는 것은 스스로 사울을 죽였다고 한 아말렉 사람을 죽인 것과 대비됩니다. 당시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죽인 것은 사울을 죽인 살인죄라기보다는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였다는데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야베스의 사람들이 사울을 장사한 것도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선대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보고 그들을 축복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의 중심에는 오직 하나님이 살아계셨던 것, 이것이 하나님께 통치 받는 다윗의 마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음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종교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앙이란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의 통치 아래 거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저와 여러분을 통치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상식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다윗의 첫 번째 통치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흔적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흔적이 여러분에게서 보여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흔적이 있는 그가 바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그 심령이 가난한 심령이고, 그 심령으로 사는 것이 곧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이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여러분의 심령을 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여서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듣는 것도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가를 배우고 깨달아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교회로 세움 받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간과한 채 교회로 모이면 결국 인간의 사업적 수완만이 교회에 난무하게 될 뿐입니다. 뭘 해도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에 초점을 두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무슨 일을 할 때 좋은 결과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에 있습니다. 이점을 깊이 명심하면서 교회로 모이십니다. 여러분이 모여서 무슨 일을 한다 할지라도 이것을 벗어나지 마십시오. 교회란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음을 증거하는 존재로 존재하는 것이 교회임을 말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일에서든 여러분 개인의 감정이나 생각, 또는 입장을 주장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입장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천국의 모습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 모였습니다. 섬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가운데는 섬김받고자 하는 사람은 한분도 없는 것이 정상입니다. 오로지 섬기지 못해서 안달이고 섬기지 못한 것으로 애통하는 사람만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교회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낮아진 심령으로 모인 천국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