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강) 사무엘하 13:15-22 다말을 미워함

<본문>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곧 저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다말이 가로되 가치 아니하다 나를 쫓아 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되 암논이 듣지 아니하고 그 부리는 종을 불러 이르되 이 계집을 내어 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라 하니 암논의 하인이 저를 끌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니라 다말이 채색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라 다말이 재를 그 머리에 무릅쓰고 그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크게 울며 가니라 그 오라비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되 네 오라비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저는 네 오라비니 누이야 시방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인하여 근심하지 말라 이에 다말이 그 오라비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압살롬이 그 누이 다말을 암논이 욕되게 하였으므로 저를 미워하여 시비간에 말하지 아니하니라(사무엘하 13:15-22)

<설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란 그릇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바닥이 없는 항아리와 같은 것입니다. 물을 한바가지 부어 넣으면 그 물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여전히 비어있는 항아리로 공허함을 느끼는 것이 곧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아마 깊이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욕망이 채워질 수 있고 만족이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적인 달라짐이 아니더라도 우선 문명과 과학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명과 과학의 배경에는 인간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명, 과학은 더 나은 삶을 추구합니다. 더 편하고 더 좋은 것을 발견하고 만들어 내기 위해 날마다 쉬지 않고 연구한 결과가 지금의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뭔가 한 가지를 발견하고 발명한 것으로 만족했다면 과연 과학과 문명의 발달이 있었겠습니까? 있었다 할지라도 그 속도와 수준은 현저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를 발견하고 발명했다 할지라도 또 다른 것을 발견하고 발명하고자 하는 욕망이 문명을 발달시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욕망은 우주까지 향해 있습니다. 우주선을 만들어서 달, 토성, 화성 등등 별들의 세계에 까지 진출하여 인간의 발자국을 찍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단순히 호기심에 의해 가보고 싶은 마음뿐이겠습니까? 굳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인간의 정복욕이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욕망을 기본적으로 간직한 채 세상에 태어났고, 그 욕망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뭔가에 마음을 빼앗긴 채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들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암논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욕망을 봤습니다. 이미 다말에게 마음을 빼앗긴 암논의 관심은 다말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 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욕망을 채우지 못해서 병까지 날 정도였습니다. 결국 암논은 요나답이라는 간교한 친구의 계략을 따라 강제로 다말과 동침을 하게 됩니다. 병이 날 정도로 다말을 원했던 욕망이 채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말을 차지한 후 암논이 어떤 태도를 보여야 옳습니까? 암논이 진심으로 다말을 사랑한 것이었다면 처녀인 다말을 강제로 욕보인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다말과 결혼하여 다말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15,16절의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곧 자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다말이 가로되 가치 아니하다 나를 쫓아 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되 암논이 듣지 아니하고 그 부리는 종을 불러 이르되 이 계집을 내어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라 하니”라는 내용을 보면 병이 날 정도로 다말을 연애하던 암논이 다말과 동침하고 난 후에는 오히려 연애하던 마음보다 더한 미움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암논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어쨌든 이것을 보면 암논이 비록 다말을 병이 날 정도로 연애하였다고는 하지만 다말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암논은 다말의 용모에 마음이 끌려 다말을 차지하고 싶은 욕망에 이끌려 행동한 것이지 다말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다말과 동침한 후에 다말을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다말이 보기 싫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결국 암논은 다말을 연애할 때의 마음보다 더 심히 다말을 싫어하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이러한 마음이 있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애당초 암논은 다말에게서 자기 욕망을 채우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욕망을 채운 후에 남는 것은 만족이 아니라 악한 자기 행위의 흔적일 뿐입니다. 따라서 악한 행위의 흔적이 가까이 있음으로 인해 자신의 허물과 악함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이 다말을 미워하게 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약점과 악함은 감추고 싶어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암논에게서 사랑과 욕망의 차이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암논은 다말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채우고자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암논이 다말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자신을 위한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다말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랑은 항상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 즉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설사 자신에게 큰 불이익이 닥친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대상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도 능히 감수하게 되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을 예수님이 보이셨고, 우리는 그 사랑을 입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을 찾으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 욕망을 위해 예수님을 찾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은 분명 거부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현대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암논이 다말을 원하는 수준에서 예수님을 찾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욕망에 있을 뿐입니다. 자기 욕망의 충족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 척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거짓 신앙에 속는 분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 주님 앞에 서게 되면 ‘나는 너희를 모른다’는 선언을 받게 되고 영원한 멸망에 빠질 대상일 뿐입니다.

이처럼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수준의 거짓 신앙은 결국 암논과 같은 반응을 보일 뿐입니다. 다말을 사랑하여 다말을 원하는 것 같았지만 정작 다말을 차지한 후에는 오히려 다말이 미워진 것처럼 자기 욕망을 위해 예수님을 찾던 사람들도 예수님에게서 얻을 것이 없다고 여겨질 때는 예수님을 싫어하게 될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마다 십자가를 외치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십자가 지신 예수로 말미암아 천국을 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즉 천국을 원하는 욕망이 인간으로 하여금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믿는 척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말씀 앞에서 들통 나기 마련입니다. 자기 욕망을 위해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기 부인’은 거부하고 피할 수밖에 없는 걸림돌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에 관심을 두고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에게서도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부자는 영생에 관심이 있는 척 했지만 결국 영생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 불과했을 뿐임이 드러났습니다. 영생에 대한 욕망도 있었지만 세상의 소유물에 대한 욕망 역시 강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걸림돌이 되어 예수님을 떠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관심, 천국, 영생에 대한 우리의 마음들이 내가 생각할 때는 신앙인 것처럼 여겨지겠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이 또 하나의 욕망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말하되 세상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때로는 세상 것을 포기할 것을 말씀하시고, 세상에 대한 욕망을 악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북스러워하게 되고 멀리 하고 싶고 벗어버리고 싶은 굴레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전해질 때 듣기 거북스러운 내용은 없었습니까? 피하고 싶고, 틀렸다고 부정하고 싶은 내용들이 없었습니까? 아마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저의 시각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여전히 자기 욕망을 간직한 채 예수님께 나오는 여러분의 잘못일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18-19절을 보면 “암논의 하인이 저를 끌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니라 다말이 채색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라 다말이 재를 그 머리에 무릅쓰고 그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크게 울며 가니라”고 말합니다.

채색옷은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의 표상이었습니다. 즉 고귀한 공주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채색옷을 찢었습니다. 이는 공주의 고귀한 신분이 짓밟히는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음을 슬퍼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재를 쓰는 것 역시 자신의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현실을 애통해 하며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머리에 손을 얹고 가는 것 역시 자신의 머리에 수치가 임한 것을 애통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암논의 욕망으로 인해 다말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비참함과 수치를 받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말이 당한 비참과 수치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비참과 수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비참과 수치는 인간의 욕망에 의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에 대한 욕망이 그들 눈앞에 존재하신 예수님이 누군가를 알아볼 수 없게 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메시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금껏 그들을 지탱하고 있었던 구원의 욕망을 포기해야 할 정도의 약한 모습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서라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증거 하신 복음은 인간의 욕망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원하는 것들을 철저히 무너뜨리는 복음입니다. 과연 이러한 복음을 복음으로 인정할 자가 누구겠습니까? 자기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라면 참된 복음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워하고 밀쳐 낼 뿐입니다. 얻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복음이기에 복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내용으로 다가옵니다. 예수 역시 인간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고 인간의 정성에 응답하는 존재로 다가올 뿐입니다. 이것을 두고 우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간교한 요나답은 암논의 욕망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계략을 제공합니다. 이것이 사단의 간교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고 인간에게 응답해주는 예수 역시 간교한 사단의 작품일 뿐입니다. 이것을 보지 못하고 예수를 찾으면서 그것을 신앙으로 오인하고 있는 것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며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신 것의 가치를 알았을 때입니다. 즉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신 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것이 신앙이지 내가 갖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것은 우상을 찾는 것과 같을 뿐인 것입니다.

암논은 다말에게서 원하는 것이 사실 없었습니다. 다만 다말과 동침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 욕망이 이루어지자 더 이상 다말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원하십니까?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다만 자신의 욕망을 위해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까? 이 차이는 신앙의 전혀 다른 면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은 다만 주님을 바라볼 뿐입니다. 겸손히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소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으로 찾게 될 뿐입니다. 자신의 욕망으로 자신의 힘으로 소유할 수 없음을 알기에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욕망을 위해 찾는다면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동원하게 됩니다. 예수님조차도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려고 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자기 정성인 것입니다. 기도의 정성, 헌금의 정성, 봉사하는 충성,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동원하여 그것으로 신의 마음을 움직여서 원하는 것을 얻겠다는 것입니다.

암논 역시 힘으로 다말과 동침하지 않았습니까? 암논이 다말에게 동침하자고 했을 때 다말은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치 못할 것이니 이 괴악한 일을 행치 말라고 충고합니다. 그리고 왕께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왕이 자신을 네게 주기를 거절치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암논은 이 모든 말을 듣지 아니하고 힘으로 다말과 동침한 것입니다. 왕에게 말해서 왕이 주기를 기다리고 왕의 처분에 맡기는 것보다는 자신의 힘을 동원하는 것을 더욱 확실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종교의 모습인 것입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처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분하신 대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못마땅해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왜 기도의 정성을 보이려고 합니까? 신의 처분에 맡기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기어코 내 욕망을 충족시키고야 말겠다는 고집이 기도에 그대로 묻어나올 뿐입니다. 결국 자기 힘으로 신조차 이기고야 말겠다는 완악함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이 신을 찾는 방식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고 신께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자신에게 있어야 할 것은 이미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심을 믿고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처분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이것을 견디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한 채 하나님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본 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 앞에서 나의 욕망이 무엇인가를 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대하면서 여전히 내 속에 감추어져 있는 욕망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욕망은 내 스스로 이길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만이 가장 귀한 것임을 깨닫고 그것만을 바라보고 원하는 소원으로 주님께 나오는 것만이 욕망을 다스리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욕망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무엇을 소유하고 얻었다 할지라도 잠시 후면 또 다른 목마름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4:13,14절을 보면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물은 마셔도 또 다시 목마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물을 바라고 주님을 찾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물을 원하지 않습니까?

물은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찾습니다. 세상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물을 찾지만, 영혼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세상이 아닌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문제는 이 갈증을 어떻게 느끼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실상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한 남자로 만족하지 못하는 여인의 실상을 드러내심으로써 여인의 문제점을 폭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에도 만족할 줄 모르는 우리의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나의 악함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결점은 오직 예수님께 있음을 자각할 때 자연히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주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욕망이 부질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 욕망조차도 주님으로 인해 무너지기를 원하면서 주님만을 바라볼 것입니다.

암논이 다말을 연애 했으나 정작 다말과 동침한 후에는 다말을 미워하는 인간의 욕망의 움직임을 여러분 자신에게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찾는 것이 욕망에 의한 움직임이 아니었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내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절대자이신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것을 받아 누리기 위해 신을 찾는 마음이며 발걸음입니다. 이 마음, 이 발걸음이 여러분께 있다면 그가 곧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