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강) 사무엘하 13:1-14 암논의 욕망

<본문>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아들 암논이 저를 연애하나 저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 누이 다말을 인하여 심화로 병이 되니라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저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 저가 암논에게 이르되 왕자여 어찌하여 나날이 이렇게 파리하여 가느뇨 내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뇨 암논이 말하되 내가 아우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연애함이니라 요나답이 저에게 이르되 침상에 누워 병든 체하다가 네 부친이 너를 보러 오거든 너는 말하기를 청컨대 내 누이 다말로 와서 내게 식물을 먹이되 나 보는 데서 식물을 차려 그 손으로 먹여 주게 하옵소서 하라 암논이 곧 누워 병든 체하다가 왕이 와서 저를 볼 때에 왕께 고하되 청컨대 내 누이 다말로 와서 내가 보는 데서 과자 두어 개를 만들어 그 손으로 내게 먹여 주게 하옵소서 다윗이 사람을 그 집으로 보내어 다말에게 이르되 네 오라비 암논의 집으로 가서 저를 위하여 음식을 차리라 한지라 다말이 그 오라비 암논의 집에 이르매 암논이 누웠더라 다말이 밀가루를 가지고 반죽하여 그 보는 데서 과자를 만들고 그 과자를 굽고 그 남비를 가져다가 그 앞에 쏟아 놓아도 암논이 먹기를 싫어하고 가로되 모든 사람을 나가게 하라 하니 다 저를 떠나 나가니라 암논이 다말에게 이르되 식물을 가지고 침실로 들어오라 내가 네 손에서 먹으리라 다말이 자기의 만든 과자를 가지고 침실에 들어가 그 오라비 암논에게 이르러 저에게 먹이려고 가까이 가지고 갈 때에 암논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저가 대답하되 아니라 내 오라비여 나를 욕되게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치 못할 것이니 이 괴악한 일을 행치 말라 내가 이 수치를 무릅쓰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괴악한 자 중 하나가 되리라 청컨대 왕께 말하라 저가 나를 네게 주기를 거절치 아니하시리라 하되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동침하니라(사무엘하 13:1-14)

<설교>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겠다는 말을 수시로 하지만 과연 그 말이 진정으로 자신의 본심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아니면 다만 습관적으로 내뱉는 말인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하지만 과연 내가 진심으로 따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니면 말씀이 아닌 다른 것인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뭔가 되어지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신자니까 신자답게 살아가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과연 내게 신자답게 살아갈 자질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린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너무 쉽게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말이 쉬게 튀어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우리의 삶에서 그대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말씀과 상관없이 우리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삶을 그대로 두고 보심으로써 우리의 실체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내 삶이 곧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나의 실체를 고발하는 증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이것을 보지 못합니다. 삶에서 나의 실체는 보지 않은 채 다만 순간적인 나의 감정과 마음만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자신은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일수록 이런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소위 거룩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보지 못하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자기 가치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삶을 내어 놓았을 때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즉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증거물이라고 말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자기가 행하고 있는 소위 선한 일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이런 좋은 일을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비록 세상이 보기에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삶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그럴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은 연약하다’는 것을 핑계 삼으면서 몇 가지 선한 것으로 여기는 행위를 내세워 그 연약함을 덮어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우린 오직 자기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자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나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엉망이 된 다윗 집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복 오라비가 이복동생을 사랑하여 결국 강제로 동침하게 되고, 후에는 버려 버리는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 형제간에 죽고 죽이는 일이 발생하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어떤 시각에서 봐야 할까요? 성경이 왜 이런 내용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암논 처럼 하지 말라는 교훈적인 내용일까요? 그러면 암논 처럼 하지 말란다고 해서 순순히 안하게 될 수 있습니까?

물론 암논과 같은 행위는 하지 않을 수 있을지 몰라도 암논과 같은 마음은 얼마든지 가질 수가 있습니다.

여자에 대한 남자의 마음은 강합니다. 비록 친척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났을 때, ‘친척이니까’하면서 좋아하는 마음을 자신의 의지대로 제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암논같이 하지 말라’는 말은 지나가는 바람과 같을 뿐입니다. 그때뿐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여자에 대한 남자의 욕망을 내세워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즉 너희는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서도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것 때문에, 기도하고 성경 보면서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여기는 것 때문에 자신의 실체가 어떠한가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아들 암논이 저를 연애하나 저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 누이 다말을 인하여 심화로 병이 되니라”고 말합니다.

암논이 다말을 사랑하게 됩니다. 비록 이복 남매 사이지만 어쨌든 형제이기에 우리의 눈에는 이것이 잘못된 것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여기에 초점을 두게 되면 앞서 말한 대로 ‘이복 남매를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결론만 남을 뿐입니다. 성경은 지금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 마음대로 의지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여자에게 마음을 뺏겼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마음을 뺏겼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니까 그런 사랑을 하지 말라’는 말이 통하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욕망인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그 대상을 내가 정하지를 않습니다. ‘내가 저것을 갖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것은 이미 갖고 싶어 하는 그것에 마음을 뺏겼음을 뜻하는 것이지 갖고 싶은 대상을 정한 후에 갖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욕망은 채워져야 사그라집니다. 물론 또 다른 욕망이 발생하지만, 어쨌든 욕망의 대상이 있을 때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그 욕망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그것은 병으로 남게 됩니다.

암논 역시 다말을 사랑했는데 스스로의 힘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심화로 병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상사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상사병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뭔가를 소망하면 그 소망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항상 생각하고 마음에 두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에서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상사병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상사병인 것입니다.

이처럼 욕망으로 인해 병이 생긴 암논에게 누가 다가옵니까? 3절의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저는 다윗의 형 시므이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는 말씀을 보면 요나답이라고 하는 간교한 자가 접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간교하다는 말에서 에덴동산의 하와에게 접근했던 간교한 뱀이 생각납니다. 그 당시 뱀의 간교함은 하와의 욕심을 일으키는 것이었고 욕심을 이루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도록 부추기는 것이었습니다. 즉 간교함은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활동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결국 암논은 요나답이 가르쳐 준방법대로 함으로써 다말을 자신의 침상으로 오게 하고 결국 강제로 다말과 동침을 한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암논이 다말을 붙잡고 ‘누이야 나와 동침하자’고 요구합니다. 그러자 다말은 “아니라 내 오라비여 나를 욕되게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치 못할 것이니 이 괴악한 일을 행치 말라 내가 이 수치를 무릅쓰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괴악한 자 중 하나가 되리라 청컨대 왕께 말하라 저가 나를 네게 주기를 거절치 아니하시리라”(12,13절)는 말로서 암논에게 그리 하지 말라는 권면을 합니다. 하지만 암논에게 그러한 권면은 통하지를 않았습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중 괴악한 자가 될 것이라고 해도 암논의 귀에 그러한 말이 들어오지를 않았습니다. 지금 다말만 차지할 수 있다면 이스라엘에서 괴악한 자가 되도 좋다는 식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이처럼 욕망은 아무리 내가 말씀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와에게도 당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먹지 말라’는 것이었고 ‘먹으면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선악과에 마음을 뺏긴 하와에게 그러한 말씀들은 관심 밖이었습니다. 하나님 같이만 된다면 죽어도 좋다는 식이었습니다. 사단의 간교함은 인간을 이런 마음으로 끌어갑니다.

암논의 욕망은 그 무엇으로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 욕망을 채우고서야 사그라졌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욕망으로 살아갑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하나님께 마음을 뺏긴 것처럼 여겨지겠지만 우리의 마음은 세상에 빼앗겨 있습니다. 그 증거는 세상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차 있고 항상 그 욕망이 채워지는 것을 꿈꾸며 살아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부인하고 싶으십니까? 가장 가깝게 여러분의 자녀에 대한 마음을 들여다봐도 쉽게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자식에 대한 부모의 욕망, 이것을 통제할 자가 과연 누구겠습니까? 그런데 자식으로 부모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결국 부모는 마음의 병을 얻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에게서 이러한 욕망을 보지 않은 채 하나님을 말하고 사랑, 믿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내 욕심에 이끌려 가고 있으면서도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한낱 희망사항일 뿐, 내가 실천할 수 없는 것임을 보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말씀을 향해 가는 것이라기보다는 내 마음을 빼앗긴 욕망의 대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즉 내 욕망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뭘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는 우리의 악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올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세상의 의와 선한 행위로 자신을 치장할 생각을 하지 말고 악할 수밖에 없고, 이 악함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무능함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악함을 모두 덮고 계시는 사랑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은 욕망을 다스리고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대해 책망하십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피흘리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증거하는 자로 사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예수님을 밀쳐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밀쳐낸 바로 그분이 나를 위해 피흘리신 몸으로 나에게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자신의 실체를 깊이 깨달은 신자에게 기쁜 소식으로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