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강) 사무엘하 12:26-31 다윗의 면류관

<본문>

요압이 암몬 자손의 왕성 랍바를 쳐서 취하게 되매 사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가로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을 쳐서 취하게 되었으니 이제 왕은 남은 군사를 모아 진치고 이 성을 쳐서 취하소서 내가 이 성을 취하면 이 성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쳐서 취하고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있는 면류관을 취하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어오고 그 가운데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도끼질과 벽돌구이를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라(사무엘하 12:26-31)

<설교>

구약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손에는 이스라엘이란 민족이 붙들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충분히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애굽의 열 재앙으로부터 시작하여 홍해 사건, 구름과 불기둥 등등 수없이 많은 기적들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고 계심을 증거하여 주었습니다. 이들은 또한 수많은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특히 칼 한번 쓰지 않고 여리고 성을 맴도는 것으로만 승리한 일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고 있음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기적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외에도 이스라엘이 겪었던 전쟁들은 하나하나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증거해 주는 것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구약에 비해 지금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계신 듯 안 계신 듯, 아니 아예 계시지 않은 것처럼 너무나 조용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우린 바로 이점을 무척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구약에서처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체험적인 사건들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들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서 그러한 놀라운 일들이 있기를 기대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체험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조용하시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수많은 사건들을 단지 체험이라는 시각에서만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단지 사건적 체험을 주기 위해 일하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성 증명으로 보고 싶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기적과 사건을 통해 증거 하셨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자기 존재성입니다. 하나님은 기적과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이것을 증거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위치에 있을 때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것도, 이스라엘에게 승리라는 복을 주기 위함이라기보다는 그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음을 증거 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문을 대한다면 본문의 내용의 의미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흔한 전쟁의 승리로만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요압이 암몬 자손의 왕성 랍바를 쳐서 취함으로 다윗이 그 성을 정복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 순서로 본다면 본문의 내용은 솔로몬의 탄생 앞에 기록되어 있어야 옳습니다. 왜냐하면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을 때 이미 진행되고 있던 전쟁이었고, 솔로몬의 탄생은 다윗의 아이가 죽은 지 몇 년 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이의 죽음과 솔로몬의 탄생 뒤에 다윗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성경은 역사적 순서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과 사건들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증거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주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 많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저는 ‘천벌’이라는 단어를 생각합니다. 못된 짓을 한 사람을 향해서 ‘너는 분명히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의 정의이지 않습니까? 세상을 보면 못마땅한 일들이 많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못된 짓을 하고도 벌은 커녕 잘 사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본문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범죄와 함께 등장하는 것이 다윗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29-30절을 보면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쳐서 취하고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있는 면류관을 취하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머리에 쓰니라”고 말합니다. 암몬 왕의 면류관을 빼앗아 다윗의 머리에 썼다는 것은 다윗의 정복과 승리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곧 하나님이 다윗을 인정하고 계심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과 다윗과의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보여주는 승리인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전쟁에서의 이스라엘 승리는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승리는 모두 여호와께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 그 증거로 승리를 주셨고, 바른 관계에 있지 못할 때에는 여지없이 쓰디쓴 패배를 안겨주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의 군사력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다윗의 승리는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럴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다윗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다윗의 범죄 행각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고 있는 신비이며 놀라운 축복인 것입니다.

세상이 가진 상식대로 하자면 다윗은 천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남의 아내와 동침하고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감추기 위해 왕의 지위를 이용해서 남편까지 죽여 버리는 행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악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악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다윗과의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증거물로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아마 지난주의 설교의 내용을 잘 기억하고 계신 분은 이미 충분한 이해를 하고 계실 줄로 압니다. 악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보여주는 다윗의 승리와 면류관,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는 아이의 죽음과 솔로몬의 탄생에 있습니다.

아이의 죽음은 다윗을 향한 단순한 심판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을 향한 심판의 차원에서, 즉 천벌이라는 차원에서의 아이의 죽음이라면 아이가 죽은 후에 다윗이 더 음식을 먹지 못하고 크게 고통을 맛보는 것으로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솔로몬을 주실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마치 병 주고 약주는 식으로 아이를 죽게 하시고 다시 아이를 주시는 것을 어떻게 심판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생각합니다. 자신의 행위가 바를 때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르게 유지되고, 행위가 바르지 못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깨어진다는 생각들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수와 허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염려하는 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이 잘못된 것임을 다윗의 승리의 면류관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범죄에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아이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의 책임을 죄 없는 아이에게 물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그 증거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솔로몬을 다윗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입니다. 즉 하나님의 용서가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바르게 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유지될 것이라는 생각은 큰 오해임을 아셔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애쓴다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삶을 살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을 가장 먼저 인정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있습니다. 결코 여러분이 잘해서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애매하게 죽임을 당한 아이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범죄로 인한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바라보며 한탄을 해야 하는 것처럼 신자란 십자가 앞에 서서 애매하게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나의 죄에 대해 한탄을 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승리와 패배, 그리고 수많은 기적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심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불신앙으로 인해 주어졌던 수많은 징계들 역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함께 하실 만한 족속들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동행하시고 인도하시고 함께 하신 것은 그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에 거하게 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시고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행위를 보시고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며 날마다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을 것이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가 바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입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다윗이 랍바를 정복하고 암몬 왕의 면류관을 자신의 머리에 쓸 수 있는 것은 다윗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31절을 보면 “그 가운데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도끼질과 벽돌구이를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와 입지 못한 자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신자의 위상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할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그것이야 말로 아무나 맛볼 수 없는 신앙의 깊은 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누가 나에게 어떤 말을 한다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사는 것을 두고 어리석다 할지라도 신자는 그 속에 보배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내어 놓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용서로 기뻐하고 사랑에 취해 사는 신자라면 당연히 용서와 사랑을 증거하고 나누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신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체험했던 사건과 기적들을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박혀 죽으신 십자가에서 체험합니다. 십자가에서 죄의 용서를 보며, 하나님과의 화목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오직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기를 원치 않는 사도의 심정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살면서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주어지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고 눈물을 흘리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 존재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에 모든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께 힘이 되는 것이고 위로가 되어질 것입니다.

26-28절을 보면 “요압이 암몬 자손의 왕성 랍바를 쳐서 취하게 되매 사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가로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을 쳐서 취하게 되었으니 이제 왕은 남은 군사를 모아 진치고 이 성을 쳐서 취하소서 내가 이 성을 취하면 이 성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요압은 자신이 랍바 성을 쳐서 정복하면 자신의 이름이 높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 와서 성을 쳐 취하라고 말합니다. 요압이 진심으로 다윗을 높이고자 한 마음이었는지, 아니면 다윗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입고 살아가는 신자로서 요압의 말과 같은 태도는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높여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지 내 이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에 더욱 더 깊이 빠져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음을 잊지 마시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지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살아가시면서 눈에 띄는 특별한 신앙적 체험이 없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체험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일종의 도구일 뿐이지 특별한 체험이 사랑을 입고 있는 증거물은 아닌 것입니다. 잘살고 못사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잘산다고 해서 못사는 사람보다, 평안하다고 해서 어려운 일이 있는 사람보다 사랑을 더 입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있기 때문임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누리고 있는 용서와 사랑이 여러분들의 면류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