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강) 사무엘하 12:24-25 여디디야

<본문>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사무엘하 12:24-25)

<설교>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 자신조차도 하나님을 높인다는 착각에 빠져 살아가고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아예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래도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을 믿는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을 돌아보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믿음의 착각에 빠져서 말씀으로 자신을 고치고 점검하려고 하기 보다는 타인을 판단하고 고치려고 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말하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마음, 그것이 지금 나의 현실이 아닌가 주의하며 살펴야 할 것입니다.

나를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타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나를 보고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된 그 눈으로 타인을 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 눈에 보이는 타인들은 분명 다른 사람들일 것입니다. 내가 비판하고 무시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입은 형제로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다윗을 통해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병든 아이를 위해 금식을 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이러한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지 않겠는가? 그래서 아이를 살려주시지 않겠는가?’라는 기대를 갖고 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다윗이 몰랐던 것이 무엇입니까? 죄는 인간의 어떠한 정성과 간절함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 것은 다윗의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죄는 인간으로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법칙으로만 해결되어짐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사하셨지만 아이를 죽이심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보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죄를 보게 될 때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인간의 정성과 간절함을 동원해서 불쌍히 여김을 받아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악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윗처럼 자기 정성과 간절함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가지고 상대하시는데, 우리는 자기 정성을 동원해서 막아보겠다고 나서는 것이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다윗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13). 하지만 다윗을 대신하여 아이가 죽었습니다. 다윗은 아이의 죽음을 보면서 죄의 삯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여 아이를 낳는데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이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심으로 인하여 낳은 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하십니다. 과연 솔로몬은 어떤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만약 세상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솔로몬’이라는 이 아이는 다윗이 승승장구하던 그 때에 태어났어야 했습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세력이 확장되어가던 그 시절이야 말로 누가 봐도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때 여호와께서 다윗을 사랑하시는 증거로 솔로몬을 태어나게 하신다면 세상이 생각하는 사랑의 기준에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작정 좋은 일만 있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기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솔로몬을 잘 나가던 다윗이 범죄를 하고 아이가 죽은 뒤에 주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심을 인하여 솔로몬을 주신 것으로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이 생각하는 상식, 기준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오해함으로써 신앙에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세상적 기준에서 사랑을 생각하고, 또 그러한 사랑을 원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신자가 누릴 수 있는 믿음의 풍성함을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이러한 신자들이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나라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범죄와 인간의 범죄를 대신한 애매한 존재의 죽음과 연관하여 나타납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솔로몬의 등장입니다.

다윗의 아이가 죽은 것은, 다윗의 죄에 대한 징벌의 차원으로 보기보다는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기 위해서는 필연코 있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일로 봐야 합니다. 만약 아이의 죽음이 없이 솔로몬이 주어졌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와 뒤섞여서 뒤죽박죽 되버릴 것입니다. 죄를 책임진 존재가 없이 무작정 나타난 사랑이기에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신의 죄를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정성과 간절함만 보이면 언제든 주어질 수 있는 사랑으로 오해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오해가 여호와의 원수의 훼방의 결과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오해를 차단하는 것이 아이의 죽음입니다.

다윗은 아이의 죽음에서 죄는 인간의 정성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보게 됩니다. 다만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일 뿐, 죽음을 막을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인간의 정성을 동원해서 신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합니다. 정성을 보이면 자신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세상의 종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성과 전혀 부합되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정성을 보시고 행동하시는 분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솔로몬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증표입니다. 여디디야란 ‘여호와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란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솔로몬을 다윗에게 주셨다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솔로몬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사랑을 입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어디서 찾고 있습니까? 제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세상의 기준은 버리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꿈꾸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도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의 욕심일 뿐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지금 여러분께 주어진 그것만으로도 과분하다는 것을 깊이 아셔야 합니다. 자격도 없고, 그럴만한 가치도 없는 우리들이 지금 이만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꿈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빠져 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히 우리의 죄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의 죄가 사함 받고 죽어야 할 나를 살리기 위해 죄없는 분이 죽어야 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사랑하는 자식이 죽은 다윗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 죄에 대한 비통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아이가 죽은 뒤에 다윗이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음식을 먹었다고 해서 마치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이해하면 안됩니다. 다윗의 행동은 다만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정성과 간절함을 거둔 것일 뿐, 부모로서 아이의 죽음에 대한 비통함은 있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자신의 죄로 인해 아이가 죽었음을 생각한다면 그 마음이 더욱 비통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여러분의 마음이 십자가에 얼마나 가깝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말합니다. 그러면 죄에 대한 애통함이 과연 얼마나 크다고 할 수 있습니까? 사실 예수님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분이 아닙니까? 가족도 아니고 친척도 아닙니다. 또한 여러분의 자식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사건에서 마음이 멀어지기 십상인 것입니다. 재난으로 인해 수십 만 명이 죽었다 할지라도 내 자식 하나 죽은 것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수십 만, 수백만이 죽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나와 상관이 없고 내 자식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말하되 마음은 예수님에게서 멀어진 상태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기쁨과 감사가 없는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죽으심을, 실제 내 자식이 죽은 것과 같은 감정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과 한탄이 없는 십자가는 이미 십자가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 스스로는 십자가를 알고 있고 믿고 있다고 착각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아이의 죽음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솔로몬’은 평강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솔로몬은 다윗이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에 있다는 증표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 관계를 가능케 한 것이 아이의 죽음인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에게 있어서 아이의 죽음과 아이의 탄생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된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사랑하사 화평의 관계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심을 입은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은 용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용서는 어떻게 주어진 것입니까? 내가 회개를 했을 때 주어지는 것이 용서입니까? 신자는 이미 하나님의 용서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용서 안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죄에 대해 설교하는 것은 무겁고 어두운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복에 대해서, 교회의 비전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밝고 활기있고 생명력이 넘치는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죄에 대한 설교가 어두운 설교일까요? 인간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넘치시고 깊으신 사랑과 은혜를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데도 어두운 설교일까요?

하나님이 다윗에게 ‘평강’이라는 뜻의 솔로몬을 주시고 여호와가 사랑하신다는 ‘여디디야’란 이름을 주시는 이 얘기들은 분명 어둡고 무거운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말하는 밝고 희망이 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들은 다윗의 죄를 바탕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인간의 죄가 있기에 은혜와 사랑이 증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랑은 용서를 보여주십니다.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고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보여주십니다. 다윗에게는 아이의 죽음과 솔로몬의 탄생으로 증거 되었고,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증거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예수님을 아는 것 자체가 삶의 힘이고 원동력이고 희망이고 비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일 것 같습니다. 다만 멸망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시기에 예수님의 의로우심 안에서 의인으로 불리며 영원한 생명이라는 기적을 안고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너무 힘없이 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자의 신자 됨에 대해서는 외면한 채 세상과 똑같이 세상을 의지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두드림을 외면하고 있는 우리를 깨우는 말씀입니다.

행복한 자는 돈과 권력으로 무장하여 세상을 휘젓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행복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아는 것이 행복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세상은 건들지를 못합니다. 세상이 가진 힘으로 굴복시키지도 못합니다. 아예 그것들에게 마음을 돌린 자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자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까? 있다면 다시금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죽으심에서 여러분 자신을 보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죄를 책임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사랑을 맛보십시오. 주님의 다시 사심이 우리에게 무엇을 증거 하는가를 생각하십시오. 부지런히 생각하십시오. 이 생각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한발자국 더 가까이 이끌어 간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복된 자이며 행복자일 것입니다. 이것이 ‘여디디야’란 이름이 주는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