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강) 사무엘하 12:13-23 아이의 죽음

<본문>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곁에 이르러 다윗을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저희로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복들이 아이의 죽은 것을 왕에게 고하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의 죽은 것을 고할 수 있으랴 왕이 훼상하시리로다 함이라 다윗이 그 신복들의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깨닫고 그 신복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사무엘하 12:13-23)

<설교>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도 움직인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기도에 대한 열의를 일으키기 위한 말이겠지만 이러한 말들이 성경과 얼마나 맞지 않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간절한 기도가 신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상식이고 소망일뿐이지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의 어떤 행위와 간절함에 의해 마음이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변함도 없이 일하시는 분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간절한 기도로 자신의 정성을 보이면 하나님도 자신을 위해 일하실 것이라는 아주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의 간절함과 정성에 의해 그 마음이 변하시고 일하시는 분인가를 본문의 말씀을 통해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은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여 낳은 아이가 죽는 내용입니다. 15절에 보면 이 아이는 하나님이 치심으로 병이 들었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아이를 치신 것은 14절에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고, 또한 다윗의 범죄의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은 죄를 범한 자에게는 징계를 내리신다 그러니 죄를 범하지 말자’라는 교훈을 주기 위한 것입니까? 그러나 이 말이 여러분께 전혀 설득력이 없음을 여러분 스스로 알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은 ‘아무리 범죄 해도 하나님이 치시는 것이 없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 죄를 범한 자를 다윗처럼 징계하시는 일이 지금의 현실에서도 계속되어진다면 살아남을 자식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은 다른 의미에서 생각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먼저 13절의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라는 구절을 보면 다윗은 이미 그의 죄에 대해 사하심을 받았으며 또한 죄로 인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은총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다윗의 죄 문제는 모두 해결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고, 또한 다윗을 죽이지도 않겠다고 하셨으면 그냥 넘어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14절을 보면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여 낳은 아이는 정녕 죽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죽이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다윗의 죄와 전혀 상관없는 아이는 죽을 것이라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죽어야 한다면 그것은 다윗이지 다윗의 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또한 기왕 다윗의 죄를 사하셨다고 하시면서 아이를 죽이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과연 용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14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이를 죽이시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이것이 아이를 죽이시는 이유입니다. 즉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하여금 여호와를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아이의 죽음이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여기서 말한 여호와의 원수는 사단의 세력임에는 분명하나 굳이 ‘이방인’으로 못 박아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훼방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예 멸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이란 존재 자체에 대해 관심이 없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의 원수는 소위 하나님을 안다고 자처하는 무리들 속에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스스로 믿는 자로 자처하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교회 속에 하나님을 훼방하는 원수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훼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은총을 훼방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은총을 인간의 생각으로 제멋대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원수가 다윗의 죄를 사하시고 죽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훼방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가 되겠습니까?

이것을 우리들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질 때 그것이 하나님을 훼방하는 원수로 등장하게 되는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자, 하나님께서 밧세바와 동침하고 우리아를 죽인 다윗의 죄를 사하셨다고 하면서 다윗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으로 다윗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일이 끝났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마음 놓고 죄짓고 용서만 구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이 다윗의 죄를 용서하신 것은 다윗이 사울을 살려주고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야’라는 생각도 들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서 다윗의 죄가 용서된 이유를 다윗의 행동에 찾으려고 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윗을 용서하셨다는 것은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생각으로 죄에 대해 가벼운 마음을 가질 수 있고, 또한 항상 죄에 대한 용서를 확보해 놓기 위해 착한 일을 행하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은총을 훼방하는 여호와의 원수인 것입니다.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라는 사람은 ‘동남아에서 발생한 지진 해일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교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말을 하고 ‘십일조 등,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동남아에 지진과 해일이 덮친 것과 같은 재앙을 받을 것이다’라는 설교를 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은총을 훼방하는 원수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원수들의 입을 막기 위해 다윗의 아이를 죽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아이를 죽이심으로써 하나님은 죄에 대해 반드시 죽음으로 갚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죄지어도 용서만 구하면 다 된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고, 다윗이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용서 받았다는 말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자식의 죽음은 곧 부모 자신의 죽음과 같지 않습니까? 부모의 마음은 내가 죽을지언정 자식은 살리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 마음에서 바라볼 때 자식의 죽음 앞에서 ‘마음 놓고 죄지어도 되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이 나의 착한 행동을 보시고 용서하셨다’는 말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비록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사하셨다고 하시고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자식을 죽음을 보면서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고 자신의 죽음을 맛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자식을 죽이시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아이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태도입니다. 다윗은 아이가 심히 앓게 되자 아이를 위해 금식을 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간구합니다(16절). 심지어 그 집의 늙은 자들이 다윗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듣지 않고 먹지도 않으면서 계속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이는 이레 만에 죽고 맙니다.

이런 경우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심히 상심하고 간구할 때보다 더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의 신하들도 그것이 두려워서 다윗에게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차마 하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신하들의 그러한 태도를 보고 아이가 죽은 것을 짐작하고 확인한 후에 보인 행동이 참으로 의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20절에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라는 구절에서 보여주고 있는 다윗의 이러한 태도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신하들도 의아해서 왕에게 묻자 다윗이 답하기를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22-23절)고 말합니다. 다윗의 이 말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

일단 우리는 다윗의 간절한 기도와 그의 기도에 응답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람들은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무참히 무너지는 것이 본문에서 보여주는 다윗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금식을 하면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간구하였습니다. 아이가 이레 만에 죽었다는 것을 보면 다윗의 금식과 기도가 이레 동안 계속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다윗의 간절함을 외면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정녕히 죽으리라는 말씀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마음을 바꾸셔서 아이를 살리셨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아마 다윗의 간절한 기도가 기도의 표본이 될 것이고,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바꾼다는 것이 진리가 돼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원수로 하여금 하나님을 훼방할 거리를 더 크게 얻게 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로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간절함, 정성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도 아이의 죽음으로 이것을 깨닫고 음식을 먹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정성으로 아이를 살릴 것에 기대를 두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정성을 돌아보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무참히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기도에서 이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된다는 말이 하나님의 뜻과 은총을 가리는 것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의 간절한 기도로 말미암아 죽을 아이가 살았다는 말을 할 수 없도록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아이를 죽이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죄인의 소원을 따라 마음을 바꾸시고 행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실 만큼 우리는 선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곧 다윗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다윗의 범죄가 우리에게 고스란히 있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가 다윗보다 더한 간절함을 보인다고 해서 하나님이 감동하실 것 같습니까? 그것은 큰 착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시고 행하실 뿐, 우리의 기도에 따라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할까요? ‘기도를 해도 듣지 않으신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어떤 속셈을 드러내는 것입니까? 지금껏 기도를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해왔다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기도의 의미, 목적을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것에만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말했을 때 기도의 의미와, 목적 자체가 사라지게 됩니다. 때문에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기도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자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죽는 것을 통해 그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이 간절히 기도하면 혹시 하나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서 아이를 살려주실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다윗의 이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이 아닐까요? 우리도 기도할 때 ‘혹시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보시고 기도를 들어줄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그러한 기도에 대해 외면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이제 기도하지 말자’라는 마음이 드십니까? ‘기도해도 필요 없다’는 마음이 드십니까? 신자는 자신의 기도를 외면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 ‘역시 하나님은 나의 뜻에 따라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신다’는 사실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죄로 인한 예수님의 죽으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죽이시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셨으나 예수님을 죽이심으로써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를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우리의 죄로 인해 발생된 십자가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언제나 내 소원에만 관심을 둔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들어야 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기에 십자가를 이용하려고만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서 자신의 죽음을 보고, 죄에 대해 철저히 갚으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용서만을 보면서 안심하고 있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마음 놓고 기도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면 들어 주신다’는 말만 난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죽이지 아니하신다는 말씀 앞에서 우리가 취할 것은 감사함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세상에 대한 나의 욕구를 내어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추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제발 여러분의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저의 간곡한 소망입니다. 기도하려면 이것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정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