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강) 사무엘하 12:7-15 당신이 그 사람이라

<본문>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사무엘하 12:7-15)

<설교>

사람에게 있어서 참으로 어려운 것은 겉과 속이 동일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치장하여 남들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기를 원하는 욕망이 자신의 속을 항상 감추게 하는 것입니다. 속은 썩어 문드러진 더러움으로 가득차 있으면서 겉은 아름다운 꽃으로 위장하여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음으로서 흡족함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동화가 있습니다. [어떤 임금이 백성들에게 꽃씨를 나누어주고 가을에 심사하여 잘 기른 자는 상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온갖 정성을 다해 물을 주며 키웠지만 이상하게 꽃씨는 싹조차 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꽃집에 가서 같은 종류의 꽃씨를 사서 다시 심어 예쁘게 핀 꽃을 들고 임금 앞에 나왔습니다. 저마다 아름답게 핀 꽃을 들고 나왔지만 이상하게 임금님은 기뻐하지 않고 크게 실망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소년이 싹도 나지 않은 빈 화분을 들고 두려움으로 떨고 있습니다. 임금이 그 소년을 부르자 소년은 떨며 앞에 나와 “임금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싹도 피우지 못했습니다”라며 빌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아니다 너야 말로 정직하게 꽃을 피웠다”라고 말하며 크게 칭찬을 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임금이 백성들이 얼마나 정직한가를 시험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싹이 나지 못할 볶은 씨를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동화에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애당초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는 씨에 불과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과연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것을 요구하실까요? 사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는 나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명목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함으로써 뭔가 받겠다는 노림수를 가진 채 거짓으로 꽃을 피우고 겉을 치장을 하며 마치 아름다움이 자신의 것인 것처럼 잘난 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타인이 나의 속을 알아 채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나의 속이 발각되면 겉의 아름다움의 모든 것이 위선이며 거짓이라는 것이 자연히 발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자신의 속만큼은 꽁꽁 감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자기의 거짓과 위선에 스스로 속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는 씨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채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애를 쓰고 노력하는 모든 것들이 결국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아름다운 꽃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꽃을 피울 수 없는 자신임을 고백하는 그 모습을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십니까? 하나님은 또 우리에게서 무엇을 보기를 원하실까요? 인간으로서, 신자로서 진심으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요?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속은 탐욕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 탐욕은 결국 이웃의 아내를 탐하게 되었고 그 아내의 남편을 살해하는 죄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남의 아내를 탐한 자신의 추한 모습은 감추고 아름답고 좋은 모습만 보이기 위해 우리아를 제거한 것입니다.

이처럼 악한 일을 행하면서 다윗은 하나님의 율례에 신경을 쓰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밧세바가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음으로 동침을 하였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바리새인을 책망한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마 23:24) 꼴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겉과 속이 다르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속은 감추어 둔 채 아름다움으로 위장으로 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항상 의의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책망하기 일쑤입니다. 자신의 불의는 보지 못하고 항상 타인의 불의에 대해 분노하며 마치 정의의 편에 서 있는 것처럼 행세하기도 합니다. 다윗이 그랬지 않습니까? 나단 선지자가 말한 가난한 자에 대한 부자의 횡포를 듣고 죽일 놈이라고 분노하며 4배나 갚도록 판결하지 않습니까? 선지자의 말이 누구에 대한 것인지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에 대해 선지자 나단은 드디어 ‘당신이 그 사람이라’는 외침을 토해내게 됩니다. 선지자의 이 말은 다윗의 위선을 거둬 버리고 거짓된 아름다움에 가려져 있던 추함을 드러내는 외침이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자신의 추함을 폭로하는 선지자의 외침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13절)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당신이 그 사람이라’는 이 말에 대해 수긍을 하십니까? 다시 말해서 ‘당신이 다윗과 같은 범죄를 행한 사람이다’는 말에 수긍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윗의 범죄가 무엇인가를 모른다면 아마 수긍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다윗과 같은 추하고 악한 행위가 없다고 믿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죄를 폭로하며 책망하는 말에서 우리의 악함이 볼 수 없다면 그것은 여전히 속을 보지 못하고 겉만 보며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겉만 본다면 분명 여러분은 다윗과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겉은 다윗과 다르다 할지라도 과연 그 속은 어떨까요? 다윗의 속과 여러분의 속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8-10절의 내용을 다시 보겠습니다.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러분은 이 내용을 보면서 선지자가 무엇을 책망하고 있는가 부터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의 말씀이 여러분 자신을 향해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외침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외침이 여러분이 감추고자 하는 속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책망의 내용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다윗에게 사울의 여자까지 주셔서 많은 여인을 있게 하셨는데 아내가 한 사람인 우리아의 처를 빼앗은 것을 책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는 말씀의 의미가 ‘지금 있는 여자로 부족할 것 같으면 더 주었을 것이다’라는 뜻으로도 이해될 가능성이 있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이해는 마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결국 선지자의 책망은 여자를 빼앗은 행위나 살인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님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선지자는 다윗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업신여겼음을 책망합니다. 이 경우 역시 살인하지 말라는 규례나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규례를 어긴 것을 두고 말한 것이라면 우린 적어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업신 여긴 자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하나님을 업신여기기 위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생각하면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임을 알지도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범죄 하면서도 하나님의 규례에 순종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밧세바와 동침하면서도 그를 깨끗케 한 후에 동침하였고, 부자의 횡포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도 4배나 갚도록 하라고 함으로써 규례에 따라 판결을 한 것을 보면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법도를 힘써 지켰다’는 것으로 얼마든지 자신을 정당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아름답게 보이는 꽃으로 자신을 위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있는 행위로 자신을 정당화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기도를 하건 성경을 보건 주일을 지키건 그 무엇으로도 정당해질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애당초 싹을 피울 수 없고,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는 죽은 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을 때 여러분은 길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하나님 업신여김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지난주의 말씀을 통해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얘기에서 부자의 악함은 가난한 자의 아픔을 무시하고 자신의 유익만을 꾀한 것에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의 아픔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그가 가난하다는 것, 즉 무시해도 좋은 약자라는 것이 원인입니다. 무시하고 아픔을 주어도 자신에게 보복할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아가 이렇게 당한 것입니다. 우리아는 이방인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이방인은 나그네와 같으며 무시 받는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밧세바를 빼앗긴 것 역시 우리아가 약자였기 때문입니다.

11:2-3절을 보면 다윗이 목욕하는 밧세바를 목격했을 때 무작정 데려오라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누구인가 알게 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라는 말을 들은 후 데려오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 밧세바가 이스라엘의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의 아내였다고 해도 동침하고자 했을까요? 아마 후환이 두려워서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아는 자신에게 보복할 힘이 없다고 여겼기에 마음 놓고 데려오라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약자이기에 마음 놓고 힘을 휘두르는 이것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약자에 대해 힘을 휘두르고 업신여기는 것이 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 될까요? 그것은 자신을 힘있는 자라 여기는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이시며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힘 있는 자로 행세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힘으로 여기는 모든 것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다윗을 왕으로 삼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다윗을 택하여 기름을 붓고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에 다윗은 우리아와 똑같은 약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아와 같은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사고방식이야 말로 여호와를 업신여기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가 곧 우리가 아닙니까? 사람은 겉을 보면서 정중히 대우해야 할 사람, 가볍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으로 구분하고 판단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마치 전자계산기처럼 눈에 보이는 겉모습이 입력이 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행동수칙이 자동 계산되어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서 오늘 본문은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폭력적인 존재입니다. 폭력을 통해 쾌감을 얻기도 합니다. 이러한 폭력은 항상 약자를 향해 집중되어집니다.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지 않습니까? 나보다 약하다고 판단되어지기에 말을 함부로 하게 됩니다.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게 됩니다. 이런 우리에 의해 우리아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이 폭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약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것에도, 세상의 폭력을 드러내기 위한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불의를 약자로 오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씨앗을 주고 길러라고 하신 임금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당초 아름다운 꽃을 기대하지 않고 씨앗을 준 임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임금의 뜻을 오해한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죽은 씨앗이 아름다운 꽃을 맺어서 하나님께 보이려고 기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정직한 것은 아무런 싹도 나지 않은 화분 그대로 들고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것이 내 모습입니다’라고 고백하며 나가는 그것이야 말로 신자로서 가장 정직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13절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는 이 고백을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게 된 다윗이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을 정당한 자로 보지 마십시오. 나오는 것은 판단과 비판 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왜 사랑이 없는가?’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 말 역시 자신을 정당하게 보기 때문이 아닐까요? 즉 ‘나는 사랑이 있는데 당신들은 왜 사랑이 없느냐?’냐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신자는 비판과 판단을 하기 전에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외침을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다’는 고백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 고백이 진실 될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