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강) 사무엘하 12:1-6 다윗의 죄

<본문>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사무엘하 12:1-6)

<설교>

여러분은 다윗의 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간음죄일까요? 아니면 살인죄일까요? 십계명에 분명 간음하지 말라는 것과 살인하지 말라는 항목이 있으니 다윗의 죄는 십계명에 저촉되는 간음과 살인의 죄를 범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간음이나 살인은 분명 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보다 다른 무엇인가를 중대한 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을 보면 죄를 범한 다윗에게 선지자인 나단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양과 소가 심히 많은 부한 자가 작은 암양 새끼 하나 뿐인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아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해 잡았다는 가상적인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이 나단 선지자의 가상적 말에서 어떤 죄를 떠올리십니까? 부자의 탐심, 혹은 약자에 대한 강자의 억압이 아니겠습니까?

나단의 이 말은 다윗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점에서 볼 때 나단 선지자의 비유는 참으로 이상하다 할 수 있습니다. 말씀 드린 것처럼 나단 선지자의 비유는 다윗의 간음이나 살인죄를 지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지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다윗에게서 간음이나 살인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중한 다른 죄를 보고 계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우리는 다윗에게서 간음이나 살인죄를 중요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다윗을 지적하시고 심판하실 권한이 있으신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 죄악에 대해 우리 자신들은 무지하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의 죄에 대해서도 무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말을 실제 사건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새끼를 사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5,6절)였습니다. 즉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말에서 자신의 허물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선지자가 지금의 말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이웃의 여인을 범하고 그 남편까지 죽여 버렸다는 내용으로 다윗에게 말했다면 다윗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의 허물을 떠올리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실제 행동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나단 선지자의 말에서는 다윗의 실제 행동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다윗은 가난한 자의 재물을 탐내서 빼앗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왕으로서 양새끼를 빼앗은 부자에 대해 ‘마땅히 죽을 자라’는 분노와 함께 ‘양새끼를 사 배나 갚아 주어야 한다’는 처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의 말에는 분명 다윗의 죄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단 선지자가 보는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에게서 보시는 죄악인 것입니다.

1절의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라는 내용을 보면 나단이 개인적인 의분으로 다윗을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책망하시기 위해 나단 선지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말은 선지자 개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선지자의 말에서는 다윗의 죄가 무엇인지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서 간음이나 살인 죄, 혹은 전쟁 중에 자기 홀로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나태함, 이런 것들만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죄에 대한 시각이 인간의 잘못된 행동에만 치우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들의 좁은 소견이기도 합니다. 죄에 대한 이러한 좁은 소견으로 성경을 대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 자신이 죄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당당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세워서 지적하시는 다윗의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면 지금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깊은 죄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가를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의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지금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잠깐 언급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인도,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등의 해일로 인한 참사로 온 지구상이 떠들썩합니다. 사실 이 지진은 해일이 일어난 그들 국가만의 재난이 아니라 다른 국가에도 연관된 재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재난을 당한 곳이 관광지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던 탓입니다.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무관하지 않지 않습니까? 몇 명인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지만 사망자만 지금 수 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실종자만 해도 스웨덴이 2500명, 독일 1000명, 이탈리아 700명, 노르웨이 462명이라고 합니다. 그 외 세계 각국의 실종자가 몇 명인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재난을 대하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음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불쌍하다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돈이 없어서 저런 곳에를 가지 못하니 이럴 때는 돈 없는 것이 복이라는 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러한 재난을 보면서 지금 여러분께 주어진 상황과 형편에 대해 감사하고 계십니까? 이 지구상은 결코 안전한 곳이 못됩니다. 사건과 사고, 수많은 재난들이 우리가 미처 예측하지 못한 가운데 쉴 새 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슨 일로 인해 오늘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 우리가 위험천만한 세상의 틈바구니 속에서 아직 생존해 있다는 것이야 말로 기적이라 여겨지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살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의 나에 대해 감사함이 있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재난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불평과 원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타인이 겪는 재난이 아무리 크다 한들 그것이 지금의 내 형편보다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내 자신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다윗에게 있었던 것이고,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지적하기 위해 나단 선지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럼 나단 선지자의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나단 선지자의 얘기의 중점을 부자가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은 것에 두기 쉽습니다. 그리고 부자에 대해서 다윗과 같은 분노를 가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약자의 편을 들고 싶어 하는 동정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린 다윗처럼 내 자신의 악함이 무엇인가를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은 경험이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또한 설사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은 경험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남의 것을 빼앗았구나’라는 양심의 가책 정도가 전부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보다 더 중한 다른 악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에서 주의를 기울어야 하는 것은 3절의 내용입니다.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이라는 이 내용이 나단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중심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있어서 암양 새끼는 단순한 재산이 아니었습니다. 자식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암양새끼를 잃는다는 것은 자식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재산을 빼앗겼다면 분노는 있을지언정 자식을 잃은 것과 같은 아픔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식을 잃었다면 분노보다는 아픔이 그 마음을 차지할 것입니다. 양새끼를 잃은 가난한 자의 마음이 바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결국 부자는 자식처럼 여긴 양새끼를 빼앗긴 가난한 자의 아픔을 도외시한 것입니다. 타인의 아픔보다는 자신이 손해 보지 않는 것만을 염두에 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중요하게 보시는 죄악입니다.

그럼 다윗에게 이런 악이 있었습니까? 예, 있었습니다. 밧세바를 범한 것이 바로 그것이고, 우리아를 죽인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면서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기는 남편의 심정은 생각하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은 나만 좋으면 다른 사람이야 어떻든 상관없다는 사고방식과 같습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밧세바를 범한 것을 남편이 알았을 때의 아픔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에게 좋은 대로만 행동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악함이었던 것입니다. 간음이란 이런 악함에 의해 튀어나온 흔적인 것입니다.

우리아를 죽인 것 역시 같습니다. 11:26절에 보면 “우리아의 처가 그 남편 우리아의 죽었음을 듣고 호곡하니라”고 말합니다. 밧세바가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크게 슬퍼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시 다윗은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 몰면서 남편을 잃은 여인의 슬픔에 대해서는 도외시한 채 단지 자신을 지키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위하는 것이고, 자신에게 좋은 것이라면 타인이야 아픔이 되건, 슬픔이 되건 상관하지 않는 사고방식이 나단 선지자의 얘기를 통해 지적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것을 큰 악으로 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간음이나 살인과 같은 행위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정당한 마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보다 낫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단 선지자의 말에 담겨 있는 악함에 대해서는 어떠합니까? 결국 우리 역시 다윗과 같은 악함으로 살았노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앞서 재난에 대한 말씀을 드린 것도, 비록 재난을 겪는 사람들을 보며 불쌍하다는 마음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들의 재난, 그들의 아픔보다는 여전히 자신의 이익이 우선으로 되어 있는 악함으로 인해 감사함보다는 불평과 원망을 일삼는 우리의 죄악을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비록 간음이나 살인과 같은 행위는 없지만 깊은 죄악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악함을 볼 수 없었던 것도 행위에서 죄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며 깨끗한 자로 살기 위해 힘썼던 그들로서는 자신들에게서 그 어떤 악함도 찾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보다 깨끗한 자는 없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고,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내면으로부터 돌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내면을 지적하셨던 것이고, 바리새인들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못하고 예수님에 대해 분노하게 되고 결국 죽인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의 말에서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한 다윗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나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나는 정당한데 다른 사람이 정당하지 못한 것만 눈에 들어올 뿐입니다. 내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간파하지 못합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말한단 말입니까? 자기의 죄도 보지를 못하면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액자 안의 그림처럼 치장용으로 전락해 버렸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은 주님께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던 주님께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흘리신 그 피가 우리의 생명이며 구원임을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왜 우리가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희망이 없는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함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려움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 자체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탐심, 내게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 타인의 아픔을 도외시 하는 것, 이런 것들은 간음이니 살인이니 하는 악에 비해서는 가벼운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에게서 간음이나 살인을 죄로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을 악으로 드러내심을 기억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