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강) 사무엘하 11:14-27 우리아의 죽음

<본문>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부쳐 요압에게 보내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의 있는 줄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신복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 요압이 보내어 전쟁의 모든 일을 다윗에게 고할새 그 사자에게 명하여 가로되 전쟁의 모든 일을 네가 왕께 고하기를 마친 후에 혹시 왕이 노하여 네게 말씀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에 그처럼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저희가 성 위에서 쏠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을 쳐죽인 자가 누구냐 여인 하나가 성에서 맷돌 윗짝을 그 위에 던지매 저가 데벳스에서 죽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성에 가까이 갔더냐 하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라 사자가 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요압의 모든 보낸 일을 고하여 가로되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승하여 우리를 향하여 들로 나온 고로 우리가 저희를 쳐서 성문 어귀까지 미쳤더니 활 쏘는 자들이 성 위에서 왕의 신복들을 향하여 쏘매 왕의 신복 중 몇 사람이 죽고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다윗이 사자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저를 담대케 하라 하니라 우리아의 처가 그 남편 우리아의 죽었음을 듣고 호곡하니라 그 장사를 마치매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오니 저가 그 처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사무엘하 11:14-27)

<설교>

사람은 자신을 신봉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을 위해 살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는 이러한 인간의 욕망을 따라 끊임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우리 스스로 극복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자신에 대해 완전히 죽은 상태라면 혹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죄는 그림자처럼 평생토록 우리에게 붙어 다니는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는 죄에 대해 별로 심각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아마 반복되는 죄로 인해 죄를 아예 당연시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죄를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도 염두에 둘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죄를 좋아하는 자로서 죄를 떨쳐 내고 싶지 않은 핑계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어떻게 죄를 좋아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죄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사람을 힘들게 하는 요소를 갖고 접근하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할 것을 가지고 접근을 합니다. 사람을 위하는 것, 사람이 좋아할만 한 것을 미끼로 하여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을 할 때도 힘들어 하고 괴로워했습니까? 밧세바와 동침하는 것이 다윗에게 고통이었습니까? 오히려 즐거움이었지 않습니까? 이처럼 인간이 좋아하는 것을 제공하며 죄로 다가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이긴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일 뿐입니다.

다윗을 보면 그의 생각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감추는 것입니다. 왕이라는 체면을 세우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왕이라는 인정과 칭찬을 유지하기 위해 죄를 감추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리아를 불러들여 밧세바와 동침하도록 유도 했으나 전쟁터에서 수고하는 동료들을 생각하는 우리아의 마음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우리아를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그 방법은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부쳐 요압에게 보내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14-15절)는 말씀처럼 우리아를 전투가 심한 지역으로 앞세워 나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두가 다윗의 생각이었습니다.

어떻게 다윗에게서 이러한 생각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윗은 이런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죄가 인간을 구별하여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죄가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즉 다윗이라고 해서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 본질적 죄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처음에는 우리아를 죽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아를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실패하자 우리아를 죽이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아를 죽여서라도 자신의 죄를 감추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죄를 감추기 위해 남을 죽이는 것이며 다윗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이러한 죄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 얘기는 남 얘기가 아니며 지금 나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속에 숨겨진 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어디 다윗만 이런 평가를 받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워두면 과연 다윗과 다른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우리 역시 ‘너의 소위가 내 보기에 악하다’는 평가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16-17절을 보면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의 있는 줄로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신복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아만 죽은 것이 아니라 다윗의 신복까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압은 다윗에게 사신을 보내면서 이렇게 말하라고 합니다. “어찌하여 성에 가까이 갔더냐 하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라”(21절)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왕이 지시한 일을 잘 수행했다는 보고가 아니겠습니까? 결국 요압까지 다윗의 살인 행위에 동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25절에 보면 “다윗이 사자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 시키라 너는 저를 담대케 하라 하니라”(25절)는 말을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지시로 인해 우리아 만이 아니라 자신의 신복까지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해 전혀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아를 죽이고자 한 것이 성공했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죄가 감춰지게 되었다는 것만 염두에 둘 뿐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서 그의 악함을 보고 계십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다윗이 악하니까 벌하여서 멸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다윗조차도 구주가 오시지 않으면 안되는 악한 자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제 성탄절을 지내지만, 성탄절을 아시는 대로 그리스도가 오신 날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모든 소위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우리를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에게서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죽이고, 그 때문에 신복까지 애매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아가 죽었다는 것만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입니다. 자신으로 인해 애매한 신하가 죽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내 죄가 감춰지고, 계속해서 왕으로서의 체면과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신의 죄를 드러내고 고백하며 스스로를 부족하고 불의한 자로 자인하고 고백하며 산다고 할 수 있습니까? 사실 이것은 목사로서도 부끄러운 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저의 실수나, 잘못이 있을 때 그것을 인정하기 보다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도리거나 아니면 감추려고 애쓴 경우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제가 다윗 자리에 있었을 때 다윗과 다른 모습을 보였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윗처럼 행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우리를 여호와께서 ‘악하다’고 평가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여호와 보시기에 의롭다고 할만한 행위를 만들어 내려고 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하나님 이것은 잘했지요?’라고 하면서 착하다고 여겨지는 행동이 반복될 때마다 우리는 나의 악함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기쁨도 상실돼 버릴 것이고 십자가의 은혜 역시 퇴색해 버릴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아버지가 세상에 보내신 구주의 은혜 앞으로 끌어당기고자 합니다. 그런데 구주의 은혜, 즉 십자가의 현장 앞으로 끌려나올 자는 자신의 악함을 깊이 보는 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죄를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을 노출하시고 폭로하시는 것입니다. 요즘 성경 본문이 죄를 말하는 것이다 보니 계속해서 인간의 죄인 됨에 대해 강조하게 되었는데,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것을 싫다 하지 마십시오. 저는 여러분을 죄인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세상에 구주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가 눈에 들어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죄가운데 있어서 모든 것이 잠잠하니 하나님이 안계신 것 같습니까? 모든 죄를 그냥 봐주고 넘어가신 것 같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모든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다는 평가를 내리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평가 앞에서 어찌 우리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할 수 있겠습니까? 창조주이시고 심판주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소위를 악하다고 평하시는데 어찌 덤덤할 수 있겠습니까? 요동이 일어나야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은 우리아가 살아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아가 살아있음으로 자신의 죄가 폭로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우리아가 없는 세상은 자신이 죄가 감춰지고 계속해서 왕으로서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 우리아는 죽어야 했고, 그것 때문에 신하가 몇몇 죽는 것쯤은 대수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까지도 염두에 두지 않는 인간의 지독한 이기심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은 남을 위해 자신의 모든 유익을 포기하신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예수님이 세우신 새로운 질서에 끌어 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으로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교회를 다니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우리아가 없는 세상을 원하는 것처럼 혹 우리 자신들이 예수님이 없는 세상을 원하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가 있는가?’라고 펄쩍 뛰시겠지만,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을 악하다고 선언하시고 또한 예수님이 여러분께 함께 하심으로써 모든 악이 노출되고 드러나는 것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인해서 죄가 드러나고 죄인 됨이 증거되는 것에 대해 자신의 악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더욱 깊이 알게 된 것으로 감사하는지 아니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죄를 폭로하는 말씀을 피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아의 죽음에서 예수님을 죽인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죄를 감추고 나의 약점을 가리고자 하는 우리의 본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곧 하나님의 원수이며 진노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예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