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강) 사무엘하 11:6-13 다윗과 우리아

<본문>

다윗이 요압에게 기별하여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하매 요압이 우리아를 다윗에게로 보내니 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매 다윗이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의 어떠한 것을 묻고 저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 주의 신복들로 더불어 잔지라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우리아가 그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가 길 갔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 우리아가 다윗에게 고하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오늘도 여기 있으라 내일은 내가 너를 보내리라 우리아가 그 날에 예루살렘에 유하니라 이튿날 다윗이 저를 불러서 저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 저녁때에 저가 나가서 그 주의 신복으로 더불어 침상에 눕고 그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사무엘하 11:6-13)

<설교>

‘어떻게 하는 것이 죄고 어떻게 하는 것이 죄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종종 듣습니다. 그러한 질문을 하는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그러한 질문에서 죄라고 하는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서 죄를 피해보려고 하는 발상을 엿보게 됩니다.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죄가 피해갈 수 있는 것일까요? 죄라는 것은 인간의 외부에서 인간을 노리고 기다리고 있는 적군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죄를 발견하고 피해가면 무사하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들이 죄에 대한 오해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죄는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외부에서 나를 공격하는 적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15절에 여러분이 잘 아시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 죄일까요? 이 구절에 의해 생각해 본다면 욕심으로 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그러면 죄라는 것을 사람이 과연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욕심은 인간의 외부에서 인간을 유혹하는 세력이 아닙니다. 인간 자체가 곧 욕심덩어리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 욕심으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것이 죄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에서까지 죄가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를 피할 수가 있습니까? 또한 죄를 피해 살아가는 인간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도 선지자도 죄를 피하며 살아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끊임없이 죄를 말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죄를 말하는 이유는 같은 죄를 범하지 않게 경계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죄는 끊임없이 반복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 자체가 같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같습니다. 자신에게 이로운 것, 자신에게 좋은 것, 자신에게 즐겁고 기쁜 것을 추구하는 동일한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 인간이기에 죄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은 후부터 계속 동일한 모습을 드러내며 흘러온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다윗의 범죄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이 다윗의 범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이유가 ‘너희는 다윗과 같은 죄를 범하지 말라’는 교훈을 위해서일까요? 이런 이유라면 여러분은 다윗보다 낫다고 큰소리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다윗과 같은 죄는 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과 동일한 행위는 없다 할지라도 다윗으로 하여금 밧세바와 동침하는 행위를 이끌어 낸 욕망은 갖고 있습니다. 다윗과 동일한 죄는 낳지 않았다 할지라도 욕심은 잉태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그렇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죄에서 당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범죄한 이야기는 죄짓지 말라는 교훈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낱낱이 드러내기 위함인 것입니다.

죄란 타인에게 내세울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죄는 수치거리입니다. 드러나면 모든 체면이 구겨질 수밖에 없고 고개를 들 수 없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감추려고 합니다. 죄를 감춤으로 말미암아 현재의 위신과 지위 등등을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밧세바와 동침을 한 후에 그가 잉태하게 되고 그 사실을 다윗에게 고하게 됩니다. 밧세바가 잉태한 사실은 다윗의 범죄의 증거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증거물을 은폐하기 위해서는 잉태한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밧세바가 남편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면 크게 고민할 이유는 없습니다. 자연히 남편의 아이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는 전쟁에 참가 중이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계략을 꾸미게 됩니다.

6절에 “다윗이 요압에게 기별하여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하매 요압이 우리아를 다윗에게로 보내니”라고 말한 것처럼 요압에게 기별하여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아를 보내도록 지시를 합니다. 그리고 우리아를 갑자기 부른 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도록 요압과 군사의 안부를 묻고 싸움의 정황이 어떠한지를 묻습니다(7절). 전쟁터의 상황이 궁금해서 부른 것으로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8절의 “저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식물이 뒤따라 가니라”는 내용처럼 우리아를 집으로 보내어 밧세바와 동침하게 함으로써 잉태한 아이를 우리아의 아이인 것으로 꾸미고자 한 것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이런 계략까지 세울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하지만 다윗의 죄는 이것으로 멈추지 않고 우리아를 죽이는데 까지 나아갑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을 신앙하던 다윗이 어떻게 이런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지 말기 바랍니다. 이러한 의문은 믿음에 대한 오해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데, 믿음을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으로 여김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범죄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그토록 신앙하고 있었으니 목욕하는 밧세바를 목격하고 잠시 유혹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와 동침하는 범죄까지는 가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유혹을 받으면서도 ‘나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이런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자신을 절제하고 유혹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죄를 극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가지는 것이 신앙으로 여겨지겠지만 사실 신앙과는 거리가 먼 종교적 신념과 의지에 속한 것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은 종교적 신념과 의지가 아닙니다. 그럼 신앙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베풀어지는 은혜와 긍휼을 아는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을 알기 위해서는 필히 죄인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은혜와 긍휼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에게 베풀어지는 은총이며 값없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문제는 그가 은총과 긍휼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바라보며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보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증거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다윗이 전쟁에 나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었던 것은 자신이 나가지 않아도 적들을 물리칠 힘이 이스라엘에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존재하는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강한 힘을 가진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와 긍휼의 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죄를 보지 못하고 단지 여인만 보게 된 결과를 가져 온 것입니다.

다윗은 비록 그의 신분은 이스라엘의 왕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자리에 있었지만 그의 속성은 비신앙인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껍데기는 신앙인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내용물은 비신앙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껍데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은 4절의 “다윗의 사자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는 내용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을 하면서 여인의 정결 규례를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즉 율법을 지키면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겉모습만 신앙인인척 가장하였을 뿐 그 속은 비신앙으로 가득찬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비신앙적인 요소는 참된 신앙 앞에서 폭로되기 마련입니다. 그 역할을 우리아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9절에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 궁문에서 그 주의 신복들로 더불어 잔지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라는 다윗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다윗의 계략이 뜻대로 되어 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전쟁터에서 고생을 하다가 돌아왔을 때 집으로 가서 자라는 말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군대에서 고생할 때 가장 반가운 말이 ‘휴가’입니다. 단 하루라도 지긋지긋한 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우리아 역시 얼마든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아는 집으로 가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보다 전쟁터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11절에 보면 “우리아가 다윗에게 고하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아의 이 말에서 무엇을 생각합니까?

우리아는 헷 사람입니다. 헷 사람이라는 것은 그가 이방인임을 뜻합니다. 이방인에게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소위 이스라엘의 왕이요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이라는 다윗의 현재 모습을 생각할 때 우리아와 같은 사람의 등장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의 계략은 우리아에게 적용되지를 않았습니다. 이유는 우리아가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전쟁터에서 고생하는데 자신만 편히 잘 수 없다는 우리아의 사고방식에 다윗의 술수가 통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통해서 자신의 잘못됨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죄를 감추기 위해 결국에는 우리아를 죽이는 일까지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앞에 우리아와 같은 사람을 세우신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형제를 생각하는 우리아에 비해 다윗 자신이 얼마나 은혜와 긍휼에서 벗어난 채 살아가는 가를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우리아에게서 자신의 잘못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죽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악함입니다.

즉 밧세바를 범하는 내용에서는 인간의 악함과 본질을 보여주고 있고, 우리아를 불러서 밧세바와 동침하려는 내용은 자신의 악함을 감추고 항상 깨끗한 채 살려고 힘쓰는 또 다른 악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악함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구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깨끗함입니다. 타인에게 악하고 더러운 자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고 착한 자로 보여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사 자신을 악한 자로 인정을 한다고 해도 누군가가 ‘너는 더럽고 악하다’는 말을 하면 쉽게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은 죄가 발각되면 하나님께 벌을 받을까 염려해서가 아니라 범죄한 악한 자로 비춰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밧세바를 범하되 율법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 자신을 깨끗케 하고자 한 의도임을 생각해 본다면 죄를 감추고자 한 다윗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죄가 발각되지 않고, 그래서 사람들이 다윗의 악함을 보지 못하고 여전히 신앙인으로 대우한다고 해서 다윗이 깨끗한 자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윗과 우리아에게서 우리의 현재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자리로 인도하시려고 하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참된 신앙으로 인해 자신의 악함을 발견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더 자신의 악함을 감추려는 계략만 세울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앞에 참된 신앙이 있는 신자를 세우신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나의 신앙 없음이 드러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참된 신앙인을 몰아내고 피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과 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죄는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지 않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때문에 신자는 날마다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악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를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긍휼이 살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으로 인해 무엇을 얻고자 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베풀어지는 은혜와 긍휼하심에 깊은 마음을 두고 계십니까? 이런 마음이 없이 교회를 찾고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 의도를 의심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혹 신앙을 도구 삼아 자신을 깨끗케 하려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단지 고급한 취미 생활 하나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도 아니면 혹시 있을지 모를 천국을 위해 보험을 들어놓은 수준에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깊이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의 범죄에서 우리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아신다면 지금 위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와 긍휼에 나의 모든 마음을 두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말하고 은혜를 말하면서도 왜 수시로 은혜와 반대되는 악한 모습을 드러냅니까? 은혜를 말하면서도 왜 항상 미움과 시기와 판단과 구별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까? 은혜와 긍휼에 묻힌 자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깨끗한 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숨겨진 더러움을 발견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평소 착하게 살았다고 해서 깨끗한 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우신 예수님 안에 있는 자만이 깨끗하다 일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있기 위해 자신의 악함을 발견하는 것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에게 깨끗하게 보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결국 나오는 것은 위선과 거짓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악함을 보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악함을 인정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와 자비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죄를 이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