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강) 사무엘하 11:1-5 인간의 본질

<본문>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여인이 잉태하매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잉태하였나이다 하니라(사무엘하 11:1-5)

<설교>

누가복음 18:9-14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는 그 행실을 놓고 본다면 서로 전혀 다른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하면서 의를 행한다고 하는 사람이고, 세리는 부정을 일삼는 부류의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 행실을 기준으로 한다면 하나님은 세리가 아니라 바리새인을 더 가까이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는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세리의 의로움은 행실로 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고백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고백’이라는 행함이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존재로 보는 낮아짐이 의롭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착한 행실을 많이 가지면 그 행실이 공로가 되어서 복으로 승화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자신의 행실을 착함으로 보는 것이야 말로 나와 타인을 구별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고, 그것은 곧 ‘나와 너는 다르다’는 바리새인적 사고방식을 갖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 구별의식이 하나님의 원수로 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행실을 기준으로 하게 되면 분명 나와 다른 타인의 행실이 보여지게 됩니다. 나보다 나은 행실일 수 있고 오히려 못한 행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보다 나은 것이든 못한 것이든 그러한 시각에서 구별이 발생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구별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은혜에 도전하는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고방식을 하나님의 원수로 일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이 인간을 구별한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낫다는 판단을 할 수 없음을 다윗의 죄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봤던 다윗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자신을 죽이고자했던 사울까지도 살려준 다윗입니다. 그러한 다윗이 남편이 있는 여자와 동침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다윗을 두고 과연 ‘그래도 내가 다윗보다는 낫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다윗과 같은 악한 행실을 보이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다윗보다 더 나은 것입니까? 만약 그러한 생각을 조금이나마 갖고 계신다면 인간의 내면을 보지 못한 무지로 여겨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선한 사람들이 모인 무리가 아닙니다.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악한 인간의 무리들이 이스라엘입니다. 이방인과 다를 바 없이 멸망을 받아야 할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인간성, 인간의 가치적 면에 있어서는 이방인과 나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사라져야 할 쓰레기 같은 존재라면 이스라엘 역시 그와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이 있어야 함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교회 역시 다를 바 없습니다. 교회라고 해서 선한 사람들이 모였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세상이 교회에 대해 갖고 있는 착각일 뿐입니다. 당장 여러분 자신들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착한 사람으로 규정할 자신이 있습니까? ‘나는 착하다’라고 소리칠 수 있습니까? 교회는 착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교회다움을 착한 행실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것 역시 교회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일 뿐입니다.

세상은 기독교의 기능에 인간을 착하게 순화하는 것을 포함시켜 놓고 있습니다. 때문에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 착한 행실을 보이지 않으면 교인답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란 예수님의 은혜에 마음을 뺏긴 자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의 피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용서의 은혜, 여기에 모든 마음을 뺏긴 사람들이 모여서 은혜를 노래하고 용서하심에 감사하는 무리들을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세상이 말하는 착한 행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은혜와 용서의 마음이 있기에 그로 말미암아 착한 행실이 보여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착한 행실이 교회됨을 증거하는 기준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윗이 죄를 범할 때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신 것입니다. 다윗을 간섭하셔서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실 수도 있는데 왜 그냥 두고 보셨을까요? 죄를 짓도록 방치해 버리신 것입니까?

우리는 내가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이 나를 간섭하셔서 죄를 범하지 않게 되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냥 두고 보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윗을 그냥 두고 보신 것은 다윗에게 있는 인간의 악함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하 32:31절에 보면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는 말씀을 합니다. 즉 다윗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드러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스스로의 의로움으로는 존재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결코 빛의 길을 갈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여겼던 다윗에게서 악한 죄의 모습이 드러나게 하심으로써 우리 스스로는 구원될 가능성이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돌아보게 하시는 기회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20절에 보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나의 악함을 깊이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크게 넘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모든 부분에서 믿음 없음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어느 한부분에서라도 ‘나는 믿음으로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러나 저는 신자가 믿음 없이 살았다는 것 보다는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악함을 전혀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봅니다.

이처럼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하면서 은혜를 말하고 있다면 그 은혜는 과연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러한 은혜는 결국 삶의 환경과 형편으로 인해 언급되는 수준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멸망을 받는 것이 당연한 우리의 죄의 현장에서 고백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회개는 날마다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사는 인생은 어둠뿐이며 사망으로 끝날 뿐임을 자각하며 언제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십자가의 은혜를 마음에 두고 살기를 원하는 회개가 날마다 있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게 신자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부문에서 우리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소원하며 살아가는 삶에서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다만 주일이면 빠지지 않고 교회를 다니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기독교란 종교에 안주해 버리고, 은혜에 대한 깊은 마음이 없이 은혜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적군은 이스라엘과 대적하기 위해 왕들이 출전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요압과 신복과 군대만을 보내고 자신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전쟁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승리할 것으로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안주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즉 승리를 당연한 자신의 몫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승리할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겠죠.

우리 역시 동일합니다. 여러분께 주어진 삶을 여러분의 당연한 몫으로 여기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모든 것을 내가 누릴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에 기독교란 종교에 안주해 버린 모습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내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발견치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지금까지 아무리 믿음으로 살았으며 믿음의 모습을 보였다 할지라도 밧세바를 범하는 자신의 악함을 알았을 때 과연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다윗이 죄를 범할 때마다 막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다윗은 평생 자신의 악함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은 얻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왜 하나님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존재인가를 깨닫지를 못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아무 할 말이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있습니까? 지금의 형편에 대해 하소연 할 말이 있습니다. 할 말을 찾기 전에 먼저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다윗을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분명 하나님 앞에서 떳떳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의 악함에서 날마다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분명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베풀어진 모든 것이 고맙고 감사할 따름인 것입니다.

다윗의 얘기는 다윗과 같은 악을 범하지 말라는 권면을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악은 우리 스스로 무리치고 이길 수 있는 세력이 아닙니다. 이미 내 속에 자리하고 있는 악을 어떻게 내 스스로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악을 물리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악한 존재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굳게 바라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낫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본질을 깊이 들여다보시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자신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왜 예수님만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