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2:1-4 여호와께 묻는 다윗

<본문>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다윗이 그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또 자기와 함께한 종자들과 그들의 권속들을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에 거하게 하니라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더라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설교>

여러분에게 현실적인 문제는 과연 무엇입니까? 오늘은 이 물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문제는 자신의 육신과 연관된 세상의 모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에게 먹고 사는 문제, 자식 문제,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급박한 현실적인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부도나기 일보 직전인 회사의 노동자들에게는 국회의원 선거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가 자신이 다니는 회사가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북한 용천의 폭파사고도 관심거리 밖일 것입니다. 일단 내가 살아야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현실적인 문제에 도움이 될까 해서 신을 찾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일, 즉 하나님의 현실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현실에서 벗어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도 그 내면에는 이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로 인해 자신의 현실에 하나님이 도움을 주실 것을 기대하는 욕망이 자리하기도 합니다.

목사에게 현실적인 문제는 교회일 것입니다. 따라서 명목상으로는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제를 내 걸고 많은 일을 하기도 하지만 과연 그 내면에 깔려 있는 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하고자 하는 것인가를 자신에게 정직하게 물어야 할 필요성도 있습니다.

목사에게 교회는 목사의 이름과, 자존심과, 힘과, 명예를 갖게 해주는 하나의 통로이며 수단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목사가 교회로부터 자유로와진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일 = 하나님의 일이라는 공식에 의해서 목사 개인의 욕망이 가려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형편, 또는 하는 일에 따라서 현실적인 문제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는 매우 급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거리도 되지 못하는 것이 곧 현실은 각기 다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현실이 편안하기를 원하고, 뭔가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해결되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제가 먼저 이처럼 ‘무엇이 현실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시작하는 것은 본문의 1절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었다는 내용 때문입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찌니라”

성경을 보면 다윗처럼 여호와께 묻고 행동하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종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묻는다는 것은 여호와의 지시대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여호와께 묻는 자로 살아가십니까?

이 질문이 여러분을 많이 난처하게 할 것임을 짐작합니다. 왜냐하면여호와께 묻는다고 해서 본문에서처럼 답변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때로는 구약의 성도들을 부러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는 것이 부럽기도 하고, 지금은 볼 수 없는 많은 기적을 직접 체험했다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구약의 백성들이 잘못한게 있을 때는 수만 명씩 죽기도 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쨌든 다윗이 하나님께 물었을 때 하나님은 하나하나 답변하시면서 가야할 길을 지시하십니다. 반면에 지금은 아무리 물어도 하나님은 대꾸 조차 하지 않습니다. 일상 생활에 무슨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혼자 묻고 끝나버리는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여호와께 묻는다는 것에 대해 별 신빙성을 두지 않게 되고 관심도 갖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의 경우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물을 때 답하신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이것을 할까요 말까요’라고 물을 때 ‘하라’든가 ‘하지 말라’라는 답을 직접 하신다면 얼마든지 물으며 살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물어도 하나님은 답을 하지 않으시고 현실에 변화도 없다는 사실이 하나님께 물어야 할 필요성을 상실되게 한 것입니다. 비록 묻는다 할지라도 묻는 것이 신앙이라는 생각에서 다만 형식적으로 묻는 것으로 그치는 것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윗처럼 묻고 답하면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행하는 것은 구약 때의 신앙의 모습이지 지금은 아니니까 물을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기고 넘어가야 할까요?

저는 여러분께 하나님은 성경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얘기를 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잘 아십니다. 또 그렇게 믿고 계실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음성으로 말씀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해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물었을 때 답은 이미 성경 말씀 안에 있다는 얘기가 가능해집니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께 묻고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듣는 것이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에서도 멀어져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말씀에서 답을 얻고자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여러분이 묻는 것에 대한 답이 성경에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원하는 답, 얻고자 하는 답에 대해 성경은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 성경에서 원하는 답을 듣지를 못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묻는 물음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여러분께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현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은 우리의 현실에 대해 말씀하고 있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현실에 대해 말씀하겠습니까? 답은 분명 후자입니다. 애당초 우리의 현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 그 무엇 하나도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요일에 욥기서를 공부하면서 바닷물이 땅을 덮지 못하고 일정한 경계에 머물러 있는 것도 하나님이 막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추궁하는 38-41장의 내용을 보면 온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간섭 아래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 두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즉 세상은 세상 나름대로의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현실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여기에 인간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현실을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가 원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여러분의 자녀가 어느 대학을 가야 할지, 어느 직장에 들어가야 할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이유를 아십니까? 여러분이 무슨 장사를 해야 할지, 무슨 일을 해야 돈을 잘 벌 수 있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이유를 아십니까? 병들었을 때 어떻게 하면 병이 낫고, 어떻게 해야 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이유를 아십니까? 이유는 그러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나의 현실일 뿐 하나님의 현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나에게 현실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물어야 합니까? 이것을 다윗의 물음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은 먼저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라는 물음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디로 가리이까’라고 묻는 것이 더 신앙적인 것 같은데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라고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올라갈 곳을 자신이 미리 정하여 놓고 ‘갈까요 말까요’라고 묻는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이 물음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아는 자의 물음입니다. 삼상 22:5절에 보면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이미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유다로 가라고 지시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27장을 보면 다윗은 결국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기거하고 있던 시글락을 쳤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블레셋의 땅에서 나오도록 하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다윗이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라고 기도한 것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지시를 두고 ‘지금 갈까요’라고 묻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묻게 된 동기입니다. 다윗이 유다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결국 유다로 가지 않고 블레셋 땅으로 피한 것은 장차 사울에게 망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현실에 자신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만들기 위해 블레셋 땅으로 간 것입니다. 이때 다윗에게는 사울에게 쫓기는 것만이 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유다로 보내시고자 하는 것은 이미 관심 밖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이 지금은 유다로 갈 것인가를 묻습니다. 결국 그 동기는 하나님이 다윗이 거한 시글락을 친 일과,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으로 인해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그 모든 상황을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취할 행동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고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게 하기 위해 일하시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현실인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떠나 단지 자신의 입장에서 눈앞의 상황들을 바라본다면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하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원망하지는 않았겠습니까?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있게 하십니까?’라는 불만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 불만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아무런 불만도 원망도 없습니까? 오직 되어진 일에 만족하고 감사하고 살아가십니까?

다윗이 여호와께 물었다면 그것은 다윗의 신앙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윗으로 하여금 묻고 행하는 자로 만들어 가셨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이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린 세상의 모든 일을 나에게 해가 되고 득이 되는 차원에서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생각보다는 이 일이 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만 관심을 두며 살아갑니다. 나의 일만을 생각할 뿐,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머물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수많은 일들을 동원하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 붙드시기 위해 일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묻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수고하시며 일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낮추시고 주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현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보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보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세상에서 여러분의 문제를 현실로만 보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잘 안되신다면 일이 잘 안되는 것을 현실로 보지 마시고 일을 안되게 하는 분이 계심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그러한 사태가 있게 하시는 것은 나의 마음을 낮추시고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붙들어 놓기 위함이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사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의 현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을 둘러보십시오. 하나님의 일이 보이십니까? 보여야 합니다. 만약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여러분의 육신의 유익과 연관 지어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의 영적유익을 위해 일하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돕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 여러분을 힘들게 하시고, 병들게도 하시고, 길을 막으시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일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벗어날 때 강퍅한 그 마음을 돌이키시기 위해 하나님은 수많은 사건들을 일으키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느낄 수 있는 그가 바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인 것입니다.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다윗에게 유다로 가라고 하신 것처럼 여러분께 하나님은 천국을 향하여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한 유혹에서 벗어나지를 못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천국을 향하여 가는 존재라는 신자의 주체성을 수시로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세상 속에 자신의 길을 곧게 만들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태반입니다. 이러한 우리 마음을 돌이키시기 위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쉬지 않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 있고 천국을 조금이나마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힘드신 일이 있습니까? 사는 것이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습니까? 그러한 일에서 하나님의 현실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마음으로 낮추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하나님 천국을 향해 살아갈까요?’라고 물으십시오. 그 물음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사실 다윗은 이미 유다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기에 ‘유다로 갈까요’라는 물음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치 신자는 천국을 향해 가는 존재임을 알기에 이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 물을 필요가 있느냐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데 다윗은 이미 받은 지시를 두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이것은 몰라서 묻는다기 보다는 확실한 하나님의 뜻에 거하기 위해, 그리고 순종하기 위해 묻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천국을 향하여 가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셔야 합니다. 세상을 보지 않고 천국을 향해 가는 신자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셔야 합니다. 낮아진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신자가 마음을 다른 곳에 두게 될 때 하나님은 여러 일을 통하여 그 마음을 돌이키신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날마다 하나님께 물으십시오. ‘하나님 오늘도 천국을 향해 나아갈까요?’ 분명히 하나님의 답을 들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되실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