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강) 사무엘하 10:6-19 이방인과 이스라엘

<본문>

암몬 자손이 자기가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벧르홉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과 마아가 왕과 그 사람 일천과 돕 사람 일만 이천을 고용한지라 다윗이 듣고 요압과 용사의 온 무리를 보내매 암몬 자손은 나와서 성문 어귀에 진을 쳤고 소바와 르홉 아람 사람과 돕과 마아가 사람들은 따로 들에 있더라 요압이 앞 뒤에 친 적진을 보고 이스라엘의 뺀 자 중에서 또 빼서 아람 사람을 대하여 진치고 그 남은 무리는 그 아우 아비새의 수하에 붙여 암몬 자손을 대하여 진치게 하고 가로되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가서 너를 도우리라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요압과 그 종자가 아람 사람을 향하여 싸우려고 나아가니 저희가 그 앞에서 도망하고 암몬 자손은 아람 사람의 도망함을 보고 저희도 아비새 앞에서 도망하여 성으로 들어간지라 요압이 암몬 자손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라 아람 사람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다 모이매 하닷에셀이 사람을 보내어 강 건너편에있는 아람 사람을 불러 내매 저희가 헬람에 이르니 하닷에셀의 군대 장관 소박이 저희를 거느린지라 혹이 다윗에게 고하매 저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승의 사람과 마병 사만을 죽이고 또 그 군대 장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이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사무엘하 10:6-19)

<설교>

다윗이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었으나 하눈은 다윗이 자신의 성을 탐지하여 함락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고 다윗의 신복들을 모욕하여 돌려보냅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전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 본문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6절을 보면 “암몬 자손이 자기가 다윗에게 미움이 된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벧르흡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과 마아가 왕과 그 사람 일천과 돕 사람 일만 이천을 고용한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눈이 다윗의 신복을 모욕하고 보낸 뒤에 다윗이 분노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기들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경우 그들이 할 일은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눈은 여러 곳에서 군사들을 고용하게 된 것입니다. 고용했다는 것을 보면 돈을 주고 군사를 사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방인의 방식입니다.

하눈은 다윗에게서 다만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많은 군사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많은 사람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 생각이며 이방인의 전형적인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는 것이 다윗의 많은 군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군사만 많이 모으면 다윗을 대적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니 사람만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 이방인들을 나무랄 입장이 되지를 못합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삶의 방식을 말씀드리고 우리는 그들처럼 살지 말자가 아니라 이미 그들, 즉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이방인처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을 보자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지금의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이방인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하나님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왜 제가 이런 말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을 보기보다는 사람을 보며 살아온 존재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전도를 빙자하여 사람을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수가 교회의 크고 작음을 결정하게 되고, 교회의 크고 작음은 인간의 자존심과 연결되어 이기에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교회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생각이 아닙니까? 이것이 다윗의 대적하기 위해 돈을 주고 군사를 사 모으는 암몬이라는 이방인 방식인 것입니다.

총회가 열릴 때마다 끊이지 않는 것이 총회장 투표 부정입니다. 총회장에 당선되기 위해 자기 편 사람을 만들려고 돈을 얼마를 풀었다는 말이 항상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고 있는 이방인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는 정당한 것입니까? 은석교회는 사람을 모으기 위한 의도로 총동원 전도주일과 같은 행사를 하지 않으니 사람을 보지 않는 정당한 교회입니까? 만약 그렇게 본다면 눈이 어두워져 있는 소경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역시 정당한 사람들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도 사람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겉으로만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을 들어서 암몬과 암몬을 돕는 아람을 치고 이스라엘로 승리하게 하는 내용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분명 다윗의 은총을 거부한 암몬 자손이 잘못해서 일어난 전쟁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나는 정당하고 저들은 나쁘다는 구별만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구별이 ‘하나님은 내편이다’는 잘못된 생각을 이끌어 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왜 잘못되었는가는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들여보낸 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기 위해 애굽에 재앙을 내리십니다. 결국 마지막 장자 재앙에서 이스라엘이 생명을 얻고 애굽을 나오게 되지만 애굽은 악한 이방인이고 이스라엘은 정당한 하나님의 백성들이어서 그들을 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시 애굽과 다를 바 없는 이방인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광야에서의 원망으로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애굽의 것을 사모함으로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을 후회하는 것이야 말로 이방인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이스라엘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결국 정당하고 의로운 자들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악한 자들이 들어간 것입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악해도 봐주는 방식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악함을 어린양의 희생으로 대속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다른 점은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가 모르는가?’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수없이 강조한 것 중 하나가 행위를 가지고 타인과 자신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나쁜 행동을 했을 때 그같은 행동을 하지 않은 자신은 아주 정당하게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것이 곧 행위를 가지고 구별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별을 하는 그 순간 나는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거부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눈이 다윗의 은총을 거부하듯 나 역시 예수님의 크신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정당한 자에게 무슨 은총이 필요하겠습니까? 나는 정당하니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것이야 말로 예수님의 은총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 주위에 있는 이방인은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말을 하면서 자신은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천국 갈 사람으로 여기는 정당성이야 말로 하나님의 원수가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될 분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예수 믿을 것을 권한다면 ‘나는 예수 믿고 있고 너는 안믿는다’는 구별의 자세를 버려야 한답니다. 그리고 ‘나 역시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심정에서 믿음을 권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결국 나 자신부터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고,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모든 것들이 믿음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떨 때입니까? 그런 행위가 있는 자신을 정당하게 여길 때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은총을 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교회에서 행하는 것들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하나님의 원수로 서게 하는 도구로 작용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점을 깊이 생각했으면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의미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타인에 비해 정당한 자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설사 사람을 100명 살해한 살인자 앞에서도 우리는 정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도 죄의 본성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1장에 보면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왜 10장에 이어 11장에서 그러한 얘기가 등장할까요? 자세한 얘기는 다음 주일에 드리겠지만 중요한 것은 다윗 역시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신뢰했던 다윗이지만 그가 남의 아내를 범합니다. 결국 다윗도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사람이 못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눈이 군사를 모았다는 말을 들은 다윗은 그들을 대적하기 위해 요압과 용사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아람과 암몬은 패하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분명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을 들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보지 않고 단지 사람만을 보면서 대적하는 이방인의 사고방식을 치기 위한 것이지 이스라엘이 정당해서 그들을 돕기 위해 승리하게 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든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피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그가 바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코 정당할 수 없는 자신을 보는 것, 그리고 나에게는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이 살길임을 아는 것, 이것이 최고의 신앙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신자가 되기 위해 정당하지 못함을 고백한다면 그것은 위장일 뿐입니다. 여전히 정당해지기를 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당한 신자로 여기심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의 여겨주심일 뿐입니다. 결국 정당한 신자로 여겨주시는 것조차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요압이 아우 아비새를 독려하는 말입니다. 요압의 이 말을 보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자신들은 지금 하나님을 위한 정당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자신들을 도우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압의 이러한 착각이 곧 우리들의 착각입니다. 우리는 교회 일은 곧 하나님을 위한 일이고, 하나님을 위한 일이니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는 공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식을 갖고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많은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당을 짓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분명 도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만이 아니고 뭐든 교회와 연관된 일은 하나님의 뜻을 동원합니다. 이것은 모두 엉터리일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했다가 일이 잘 안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봅니다’라고 변명을 합니다. 자기 편리한 대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이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고 말합니다. 암몬 자손을 돕기 위해 나왔던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패하자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섬기며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기준에 의해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유리한 대로 자신에게 좋은 대로 변하고 행동하는 이방인 방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믿음 역시 그와 같지 않냐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을 기준으로 하여 변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갑니까? 믿음을 말하면서 항상 내 편한 대로 살고, 나에게 좋은 대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예수 예수’ 하다가도 나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예수님께로부터 등을 돌리는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당치 못한 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을 보게 하시기 위해 이방인을 끌어 들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왜 이토록 우리의 정당치 못함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자신의 정당치 못함을 보는 자가 예수님의 피 흘리신 은혜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를 원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가 곧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뭔가 엉터리로 여겨지는 교회나 교인들을 보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우리 교회, 나는 정당하다는 생각을 가질 위험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가 하는 것처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정당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하는 것은 옳고 네가 하는 것은 틀렸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자가 무엇인가에 대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 때입니다.

이방인이든 신자는 세상에 대한 욕망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는 자신의 악함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방인은 언제나 자신의 정당성을 구축하기 위해, 즉 자기 의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라고 하면서도 신앙의 정당성을 갖기 위해 뭔가 하고자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원수된 이방인의 방식을 따르고 있는 것임을 아시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을 아시겠습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께 무척 중요한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제발 건성으로 흘려듣는 것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방인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시고 무엇이 이방인이며 무엇이 참된 이스라엘인가를 정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