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강) 사무엘하 10:1-5 거부당한 은총

<본문>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다윗이 가로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같이 하리라 하고 그 신복들을 명하여 그 아비 죽은 것을 조상하라하니라 다윗의 신복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그 주 하눈에게고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 신복을 보내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복들을 잡아 그 수염 절반을 깎고 그 의복의 중동 볼기까지 자르고 돌려 보내매 혹이이 일을 다윗에게 고하니라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왕이 저희를 맞으러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사무엘하 10:1-5)

<설교>

본문의 내용은 앞의 9장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9장에서 살펴본 내용은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푸는 다윗과 베풀어진 은총에 대해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는 말로서 크게 감사하는 므비보셋의 반응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얘기가 등장합니다. 2절에 “다윗이 가로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 하고 그 신복들을 명하여 그 아비 죽은 것을 조상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복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라고 말하는 내용을 보면 다윗이 요나단을 인하여 그 아들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푼 것처럼 역시 하눈의 아비 나하스로 인해 하눈에게 은총을 베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하스란 사람이 다윗에게 어떤 은총을 베풀었는지는 성경이 언급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다윗이 이방인으로부터 어떤 은총을 받아야 했다면 그것은 사울에게 쫓겨 다닐 시기가 가장 가능성이 큼으로 그때 도움을 받았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뿐입니다.

그런데 이 두 내용은 므비보셋이 베풀어진 은총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는 반응을 보인데 반해 하눈은 다윗의 은총에 대해 의심하고 다윗의 신복들을 조롱한 것에서 서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다윗의 은총이 므비보셋에게는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여진 반면 하눈에게는 거부당한 것입니다.

다윗의 은총을 거부한 것은 죽은 나하스를 신하를 보내어 조상하는 다윗의 호의에 대한 의심 때문입니다. 3절의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그 주 하눈에게 고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 신복을 보내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다윗이 조객을 보낸 호의를 자기들의 성을 엿보고 탐지하기 위한 것으로 의심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눈은 다윗의 신복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의복의 중동볼기까기 자르고 돌려 보냄으로서 다윗의 은총에 대해 조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내용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베풀어진 은총에 대해 므비보셋처럼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눈처럼 거부하고 오히려 은총을 모욕하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지 말고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자’라는 다짐 아닌 다짐으로 끝내 버릴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베풀어진 은총에 대해 므비보셋처럼 감사와 기쁨의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쉽게 생각하고 넘어갈 것입니다. 즉 ‘나는 절대로 하눈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지 않겠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하긴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겠다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모두가 은총을 오매불망 원할 것인데 베풀어진 은총에 대해 감히 누가 거부한단 말입니까? 또 누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역시 하눈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본문이 바로 그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와 기쁨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어느 한순간의 감상적 생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순간의 감상적 생각으로 인해 스스로 속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말씀을 들을 때 ‘감사하다. 기쁘다’라는 생각과 느낌이 있다고 해서 ‘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라고 단정 짓는 것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느낌과 생각만으로는 신앙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 신자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들 말씀으로 인해 감동을 받고, 예수님에 대해 생각을 하고, 은혜를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전부가 아니며, 그것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산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고 느끼게 된 것에 내 마음과 삶이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에 개입되지 못하는 것은 그 생각과 느낌이 아무리 신앙적이라고 하더라도 죽은 것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생각과 느낌으로는 은총을 감사하고 기뻐하면서도 정작 삶에서는 은총을 거부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은 보지를 못하고 단지 생각이 있고 느낌이 있다는 것으로 자신을 정당화 한다면 결국 자기 문제를 보지 못하는 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사실은 은총을 거부하는 자로 사는데도 자신은 은총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 대해 본문이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은총을 거부하게 된 원인은 다윗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조문객을 보낸 다윗의 호의를 자기들의 성을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하는 계략으로 의심한 것입니다. 이들이 이러한 의심을 갖게 된 것은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다윗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으며, 다윗과 친한 관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조문객을 보낸 것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호의를 보인다면 그 의도를 의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다윗이 나하스의 죽음에 대해 조객을 보낸 것은 하눈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나하스가 다윗에게 베푼 은총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윗과 자기들과의 관계에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이 자신들에게 그러한 호의를 보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게 될 것이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객을 보낸 호의를 베푼 것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으로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푼 것은 그 아비 요나단을 인해서였습니다. 하눈에게 은총을 베푼 것도 하눈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그 아비 나하스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신 것은 우리와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계산하면서 은총을 평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지 않는데 하나님이 나를 은총으로 대할 리가 없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을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으로 여기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에 있지 않는데 그런 나에게 은총을 베푼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태복음 5:45절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는 분이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시는 분입니다.

단적으로 우리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도 복은 내려집니다. 심지어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복은 내려집니다. 아마도 한국교회 분위기 상 이런 말은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십일조 등의 행위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탱을 하고 있고, 그런 관계를 내세우며 복은 자신의 몫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분통이 터질 말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중심사상이며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셔야 할 이유이며, 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복이 내려지는가?’라는 생각에 머물게 된다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로 인해서 베풀어지는 은총을 거부한 것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의심을 갖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무조건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무조건이라는 것이 생리에 맞지 않습니다. 항상 조건을 앞세우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랑을 한다면 사랑할 만한 조건이 있기 때문이고, 친절을 베푼다면 친절을 베풀만한 이유와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도 조건적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총도 받을 만한 사람이 받게 되는 것으로 복도 받을 만한 사람이 받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 주어져 있는 은총에 대해서도 조차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악인들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처럼 악하다는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남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자신을 속이려고 하고 거짓말을 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고,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 악의를 갖고 있을 때 그들이 나에게 선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믿지 않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호의도, 사랑도 조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도 조건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은총에 대해 의심하게 하고 거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께 은총을 베푸신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잘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입니다.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은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총 앞에서는 우리의 그 어떤 행위도 돌아볼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감사하고 기뻐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설명을 잘 들으셨습니까? 그리고 이 모든 말에 대해 인정하고 받아들이십니까? 그렇다면 다 된 것일까요? 앞서 말씀드리기를 신앙은 느낌과 생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시간의 말씀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여러분의 삶에 개입하여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느낌과 생각이 삶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 앞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가 무엇인가는 므비보셋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이관대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십니까?’ 이것이야 말로 은총에 대한 최고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과 느낌은 쉽게 가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누군가와의 관계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반응이 드러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은 죽은 개 같은 자가 누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신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겠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겠습니까?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으로도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비교하고 무시하는 도구로 사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은총을 믿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은총을 말하면서도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무시하고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는다면 그것이 곧 은총을 거부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한가지는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부끄러움을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가려주심으로써 은총에 거하게 하셨고, 이 은총을 아는 자로 산다면 누군가의 부끄러움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속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즉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가려주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눈은 다윗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눈은 다윗의 신복들을 모욕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 머물다가 돌아오라고 지시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배려는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웃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욕하지 않게 됩니다. 부끄러운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총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께 베풀어진 은총이 무엇이며 무엇을 근거로 하여 베풀어졌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으로 삶이 다스림 받는 자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이 은총을 받은 자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느낌과 생각이 있으니 신자로 살고 있다는 생각은 스스로의 느낌과 생각에 속는 것입니다. 은총을 거부하는지 아니면 진심으로 은총으로 사는지는 삶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삶에서 여러분의 실체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