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강) 사무엘하 8:15-9:8 공과 의

<본문>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할새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군대 장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스라야는 서기관이 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하고 다윗의 아들들은 대신이 되니라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사울의 종하나가 있으니 그 이름은 시바라 저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저에게 묻되 네가 시바냐 가로되 종이 그로소이다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시바가 왕께 고하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니이다 왕이 저에게 묻되 그가 어디 있느냐 시바가 왕에게 고하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다윗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저를 데려오니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대답하되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사무엘하 8:15-9:8)

<설교>

세상은 윤리와 도덕을 기준하여 의를 판단합니다. 윤리와 도덕에 부합된 행동을 하면 의로운 것이고, 부합되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는 악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행위 자체가 의가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어떤 행동을 하느냐로 의와 악을 판단하기에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으로 남기 위해 선한 행동을 하려고 하게 됩니다.

의와 악에 대한 이러한 의식구조가 믿음에 대해서도 큰 오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즉 신앙의 의로움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 행위로 규정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을 기독교적 행위의 열심히 이해하기 때문에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 다니는 것을 자연히 의로운 것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8:15절에 보면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하였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을 공과 의로 다스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부정부패가 없는 사회를 만들었다는 뜻이겠습니까? 왕이 축재를 하지 않고 재물에 욕심이 없이 오직 이스라엘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는 뜻이겠습니까? 세상의 기준에서 본다면 분명 그러한 것을 공과 의로 여길 것입니다. 현 사회에서도 백성이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공과 의가 바로 그러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의 공과 의가 그러한 것이라면 이스라엘은 세상의 국가가 다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 국가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공과 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백성을 다스리며 행한 공과 의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9장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알 수 있습니다. 9장의 내용은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어떻게 대하였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기에 성경에 기록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다윗이 백성을 공과 의로 다스렸다고 말한 뒤에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다윗의 공과 의가 무엇이었는가를 가르쳐주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내용을 통해 공과 의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것이고 우리 역시 공과 의로 다스림을 받은 자들이며 또한 공과 의를 행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점 역시 8:16-18절의 내용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6-18절에는 요압이 군대 장관이 되고,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사독 아히멜렉이 제사장이 되고 스라야는 서기관,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레셋 사람을 관할하고 다윗의 아들들은 대신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한 자리 차지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다윗의 신하로서 이스라엘에서 어떤 자세로서 일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이 공과 의로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처럼 이들은 다윗의 다스림 아래서 공과 의로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오늘 여러분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1-12절에 보면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일을 행하는 자로 불렀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신하들이 다윗의 다스림 아래서 다윗의 공과 의로 행하여야 하는 것처럼, 신자는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린 그 다스림을 행하며 살아가야 할 자로 부름 받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우리를 다스린 그 다스림이 무엇인가를 9장의 내용을 통해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9장의 내용은 무척 의미 있고 중대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1절에 보면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울의 종 시바를 통하여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남았는데 그가 절뚝발이라는 것과 마길의 집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데려오게 되고, 사울의 밭을 다 돌려주며 항상 다윗의 상에서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7절). 즉 므비보셋을 왕과 함께 하는 자로 지극히 높여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공과 의였던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봐도 이러한 다윗의 행위는 분명 공과 의로움일 것입니다. 왕이 백성을 사랑하는 모습이야 말로 왕의 훌륭한 인격이며 공과 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본문은 과연 다윗의 훌륭한 인격을 소개하고 높이기 위해 기록되었을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다윗의 인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윗이 공과 의로 이스라엘을 다스린 그 모습에서 하나님의 공과 의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성경의 관심입니다.

1절을 보면 다윗이 사울의 후손을 찾는 것은 요나단을 인하여 은총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요나단을 인하여라는 말은 요나단과 한 언약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사무엘상 20:15절에 보면 요나단이 다윗에게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라는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42절을 보면 다윗과 요나단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므비보셋을 찾는 것은 요나단과의 약속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후손이 누구든 상관없이 은총을 베풀기로 작정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또는 설령 그가 악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은총을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오직 약속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공과 의입니다. 이 공과 의로 인해서 므비보셋이 은총을 입고 높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중점은 ‘은총을 베풀리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다윗도 므비보셋도 은총을 베풀리라는 말씀의 깊은 의미를 보여주는 도구로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누구입니까? 바로 므비보셋과 같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로 높임을 받은 존재가 아닙니까? 절뚝발이인 므비보셋을 다윗의 상에서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처럼 아무 것도 아닌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높여주신 은총을 베푸셨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우린 다만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의 공과 의로움에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신 것은 약속을 인해서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전혀 보지 않으시고 다만 약속을 인하여 찾으시고 부르시고 높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십니다.

로마서 6:14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현실입니다. 우리를 다스리는 것은 법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만약 법으로 다스림을 받았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을 수 없습니다. 대신 우리에게 주어질 몫은 심판이겠지요. 이것이 다윗의 왕국이었습니다.

7장에서 살펴본 대로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고자 한 것은 하나님을 법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그에 대해 보답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궁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음을 송구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곧 법적인 시각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에게 자식이 죄를 범하면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은총을 빼앗지는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며 다윗은 이 의로써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므비보셋을 통하여 공과 의의 실제를 보여준 것입니다.

반면에 사울은 은혜 아래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죄에 의해 멸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은혜 아래 있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요나단으로 인하여 은총을 베풀리라고 한 것은 다윗의 왕국이 어떤 속성의 왕국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공과 의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면 다윗 왕국에 속해 있는 모든 백성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다윗을 배신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총을 거역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다윗의 은총을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8절에 보면 다윗의 은총을 입은 므비보셋이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는 말을 합니다. 므비보셋의 이 고백이야 말로 자신을 알고 은총을 안 사람의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므비보셋은 자신을 죽은 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실제 자신을 그토록 하찮은 존재로 여긴 것입니다. 다윗의 그러한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므비보셋에게는 다윗으로부터 그런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다윗을 위해 공을 세운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쓸모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13절에 보면 므비보셋은 두 발이 다 절뚝이었습니다. 두 발이 모두 절뚝이라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13절 마지막에 이것을 언급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므비보벳은 다윗과의 어떤 법적인 관계에서 그러한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요나단을 인해서라는 것입니다. 약속, 그것 하나로 인해서 왕의 자리에서 함께 먹는 높임을 받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22:29-30절에 보면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것이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입니다. 우리는 이 은총 앞에서 므비보셋과 같은 고백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종이 무엇이관대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는 고백이 없다면 그에게 하나님의 은총은 깊은 감사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죽은 개 같은 존재임을 아십니까? 은총이 아니면 구원의 가망은 전혀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왕의 상에서 먹고 마시게 된 존재로 높임 받게 된 것입니다. 죽은 개 같은 우리를 용서 하시고 은총을 베푸신 이것이 사랑이며, 이것을 하나님의 공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잘 지켜서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약속으로 인해서 용서하시는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사랑할 자를 사랑하시고 건지실 자를 건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며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이 의를 그대로 적용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이 의로 말미암아 살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의 앞에서 우리의 의를 내세우고 자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야 말로 공과 의로 다스리는 다스림을 벗어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므비보셋은 사울의 자손입니다. 사은 다윗을 죽이려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 의해 보복을 받아야 할 존재인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무서워 말라’(7절)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법적인 관계로 므비보셋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할 우리가, 멸망에 처해야 할 우리가 생명에 거하게 된 이유를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법적으로 대하지 아니하시고 은총으로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용서로 다가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공과 의로 다스림 받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은총으로 다가오신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법적인 관계로 다가서려는 오류를 인간이 범하고 있습니다. 은총을 말하면서도 법적인 위치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행위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의로운 행위를 만들어서 그것을 조건 삼아 복을 챙기려는 악한 의도를 버리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말하되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는 것이고, 은총을 말하되 은총 아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공과 의, 사랑을 말하되 공과 의로 다스림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이웃을 만나고 대할 때도 항상 법적인 관계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용서로 다스림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사랑과 용서의 다스림 아래 있기 때문에 멸망의 자식이 아니라 생명의 자식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받은 예수님의 것으로 세상을 다스려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다윗은 공과 의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윗 왕국의 신하로 세움 받은 사람들은 다윗이 다스리는 공과 의 아래서 이스라엘을 세우고 돕는 자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군대 장관으로 사관으로 제사장으로 서기관으로 신하로 부름 받았습니다. 높고 낮음의 의미가 아니라 여러분을 다스린 하나님의 공과 의로써 이웃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공과 의를 증거하는 것, 이것이 여러분의 사명입니다.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고 은총을 베푸신 사랑과 용서하심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항상 감사하면서 내가 받은 사랑과 용서로 이웃을 만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세상에 전파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발이 다 절뚝발이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란 말입니다. 그런 여러분을 대단하게 보고 계십니까? 착각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기 분수를 모르는 어리석음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베풀어진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이 감사가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고,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입니다.

교회는 대단한 사람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죽은 개 같은 존재가 모이는 곳입니다. 사회적인 신분과 위치, 부요함으로 인해 구분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다만 죽은 개 같은 존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경험만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이러한 고백과 경험이 있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공과 의가 우리를 살리고 있는데 여러분의 행위에 관심을 두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를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십시오. ‘무엇을 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되면 결국 특정한 행위를 신앙적인 행위로, 의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살아가는 모든 것이 신앙이어야 합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삶은 그 자체가 은총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