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강) 사무엘하 8:1-14 승승장구

<본문>

이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 받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으니라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저희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 모압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르홉의 아들 소바 왕 하닷에셀이 자기 권세를 회복하려고 유브라데 강으로 갈 때에 다윗이 저를 쳐서 그 마병 일천칠백과 보병 이만을 사로잡고 병거일백 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다메섹 아람 사람들이 소바 왕 하닷에셀을 도우러 온지라 다윗이 아람 사람 이만 이천을 죽이고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다윗이 하닷에셀의 신복들의 가진 금방패를 빼앗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또 하닷에셀의 고을 베다와 베로대에서 매우 많은 놋을 빼앗으니라 하맛 왕 도이가 다윗이 하닷에셀의 온 군대를 쳐서 파하였다 함을 듣고 그 아들 요람을 보내어 다윗 왕에게 문안하고 축복하게 하니 이는 하닷에셀이 도이로 더불어 전쟁이 있던 터에 다윗이 하닷에셀을 쳐서 파함이라 요람이 은그릇과 금그릇과 놋그릇을 가지고 온지라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저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 다윗이 염곡에서 에돔 사람 일만 팔천을 쳐죽이고 돌아와서 명예를 얻으니라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사무엘하 8:1-14)

<설교>

사람은 타인의 입장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나로 인해서 누군가가 아픔을 겪고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으로 슬퍼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승리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이 자연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대학입시에서 자신의 자식이 합격을 했을 때, ‘내 자식이 합격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불합격하여 실망하고 있을 것이다’는 생각으로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혹 있다면 승리로 인해 주어진 여유에서 나타나는 관대함일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또는 반대로 자신의 자식이 입시에 실패했을 때 ‘내 자식이 실패함으로 다른 사람이 합격했잖아’라는 생각으로 마음에 안위를 얻는 사람이 있을까요? 혹 있다면 이것은 자식의 실패로 인해 낙심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해서 고의로 마음의 여유를 보임으로 실패 속에서 무너지지 않으려는 자기 지탱이 아닐까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도 들겠지만 그러한 생각이 든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 포기는 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포기를 할 수 없는데 나 말고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는 말에 대해 반발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가?’라는 말로서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현재 자신의 모습에 대한 정당성을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냐는 주장으로 펼침으로써 여전히 자기입장을 고수하겠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때리고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두고 아버지께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분명 자신의 입장에서 벗어난 타인의 입장을 바라보며 하신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니까 그러한 모습을 보이시는 것이 당연하지’라고 말씀하고 싶습니까? 하지만 이 생각이야 말로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는 나다’는 비신앙적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예수를 단지 추앙하는 대상으로 여길 뿐,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신앙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비신앙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도행전에서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외치고 죽은 것을 보면 ‘예수님이니까 그렇지’라는 말은 끝까지 자기 입장을 고수하고자 하는 사람의 고집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에게는 신앙역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고 도와주는 도구로 인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을 주는 성경구절이 있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자신을 도와주고 성공하는 쪽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머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본문 역시 그러한 오해를 일으킬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설교 주제 그대로 다윗의 승승장구입니다.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며 빼앗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블레셋(1절)을 정복하고, 모압(2절), 소바(3-8절), 아람, 암몬, 아말렉, 에돔(9-14절) 등을 정복한 것입니다. 다윗이 정복한 이 나라들은 이스라엘보다 약한 국가들이 아니었습니다. 블레셋만 해도 이스라엘로서는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강대국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강대국을 하나하나 격파하면서 승승장구하는 다윗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매맞고 고통을 겪는 내용을 볼 때, 사실 그들의 사명감에 대해 감동을 갖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나 자신을 그러한 길로 인도하시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본문의 다윗과 같이 승승장구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하나님께 열망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는지,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시고 어떤 인생길로 인도하셨는지, 또 하나님께서 어떤 뜻과 생각으로 다윗에게 이렇게 일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아예 관심의 대상도 아닙니다. 오직 다윗에게 하신 것처럼 나에게도 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본문에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때로는 자기 백성을 고난으로 인도하시기도 하지만 다윗에게 하신 것처럼 승승장구하는 인생으로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생각하고 싶으십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무조건 고난으로만 인도하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게 하시는 하나님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생각이라면 과연 무엇을 포기하지 못하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신자가 성경에서 보고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생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깨달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도 동일합니다. 다윗을 승승장구하게 하신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입장에서 벗어난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좋은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기 입장을 고수한 채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의 내용을 자신의 소원과 일치시키려는 노력만 하게 될 뿐임을 아셔야 합니다.

비록 다윗이 승승장구를 하고 있긴 하지만 본문에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6절, 14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는 구절입니다. 즉 다윗의 승승장구의 배경에는 이기게 하시는 여호와가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 문구 하나를 두고서도 생각은 갈라지게 됩니다.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자의 생각과, 자기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둔 자의 생각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둔 신자가 이 말씀을 대한다면, 어디를 가든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다는 방향의 생각을 하蕁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자는, 다윗의 승승장구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고,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나에게 그만한 조건이 있어야 함을 생각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이 자신을 승승장구의 길로 인도하실만한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결국 조건을 갖추기 위해 뭘 해야 할 것인가를 궁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식의 신앙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을 향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시는 것은 다윗에게서 그만한 조건과 자격을 보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의 승승장구와 다윗의 인간됨됨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엉망으로 살았는데도 승승장구의 길을 주셨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다윗이 엉망으로 살았다면 그를 징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벌이 아니라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함일 뿐입니다.

다윗의 승승장구도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차원에서 생각해야합니다. 7: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단선지자를 통하여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심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에서 바른 신앙은 어떻게 드러날까요? 즉 다윗이 날마다 승승장구하는 현실에서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판별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승리가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언제나 잊지 않는 것으로 판별됩니다. 즉 승리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관심을 다윗의 승리에 두고 있습니다. 다윗의 승리가 부럽고, 다윗을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이 좋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승리가 주어진다면 승리로 기뻐할 뿐,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서는 멀어질 것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마음을 드러내게 합니다. 그래서 승승장구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별 것 아닌 존재인 나를 승승장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고마운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경우에든 하나님을 높이게 되는 것이고 감사함을 잃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입장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승승장구하는 것이 좋아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단지 입에 붙여 놓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받아서 좋다는 것이겠죠. 이러한 사람은 싫어하는 것, 즉 승승장구 대신에 실패와 고통이 주어진다면 당장 감사도 ‘감사합니다’라는 말도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운 모습은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양한 원망으로 무장한 이스라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즉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이곳에 있게 하셨음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야 말로 이스라엘다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별의 도구로서 약자, 즉 고아, 과부, 나그네들을 그들의 이웃으로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점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움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다윗이 만약 자신의 승승장구만을 바라보고 그것으로 기뻐하였다면 그것이야 말로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승리를 기뻐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스라엘이 강한 국가가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공로이며 은혜임을 잊지 않는 것이야 말로 다윗다운 모습이며, 이스라엘의 참된 왕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9장에서 사울의 아들인 므비보셋 얘기가 언급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움이 약자에 대한 반응에서 나타나고 분별되는 것처럼 다윗의 다윗다움이야말로 므비보셋을 대하는 것에서 분명히 분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습니다. 승리를 바라보고 좋아하기보다는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초점을 두지 바랍니다. 다윗에게도 관심을 두지 말기 바랍니다. 인간을 두고 따진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섬김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보고 이기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약속 안에서 다윗을 인도하시고 지키시고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약속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좋아해야 할 분은 누구십니까? 당연히 하나님이라고 하시겠죠? 하지만 어떤 하나님이냐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승리를 주셨다는 것으로 감사한다면 나중에 좋아하지 않은 것이 주어졌을 때 감사가 아니라 원망이 나오게 될 뿐입니다. 신자가 의지해야 할 분은 나같은 자에게 이같은 승리를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승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섬김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설사 고난에 위치한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은혜와 사랑에 거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와 사랑이 삶의 모든 영역에 자리하고 우리를 다스릴 때 신자다움이 마음껏 증거될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높이는 신자다움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