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강) 사무엘하 7:25-29 다윗의 기도

<본문>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확실케 하옵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사람으로 영원히 주의 이름을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시며 주의 종 다윗의 집으로 주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 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사무엘하 7:25-29)

<설교>

오늘은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의 기도를 통해서 기도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기도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분명 기도하지 않는 신자는 옳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성경 또한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오해로 인해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신자로서의 참된 기도와는 동떨어진 기도로 전락해 버린 모습도 많이 보여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잠언서 28:9절에 보면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기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즉 말씀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고 말씀과 상관없는 기도는 오히려 가증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기도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해서 모든 기도가 옳은 것이 아니며 신앙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기도가 하나님 앞에서 악만 더욱 쌓아가는 행위로 남을 수 있음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도 한다’라는 것보다는 ‘기도가 무엇인가?’를 먼저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분위기는 기도를 하는 것에 치중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보다 기도를 할 것을 강조하고만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가 기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면 기도하라는 강조의 말이 없다 할지라도 자연히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인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신자가 기도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교회가 버려야 할 것은 기도를 오래 하고 많이 하는 것을 무조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기도를 많이 하라거나 오래할 것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그것을 신앙이 있는 것으로 말씀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데살로니가전서 5:17절에 보면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지만 쉬지말라는 말씀의 의미는 오랜 시간 기도하라는 양적인 의미가 아니라 신자는 어떤 형편과 환경에서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어야 함을 의미하는 내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혹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구해서 받는 것’으로 이해하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모든 사람이 하고 있는 기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도하며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욕망과 소원이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욕망과 소원은 자기 배부름에 있습니다. 자기 배부름을 위해 신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배부름과는 거리가 먼 기도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6:31-32).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은 생존의 문제입니다. 즉 이방인은 오직 자기 생존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자기 생존의 풍성함을 두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내용을 담은 기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기도가 무엇인가를 바로 깨달음으로써 이방인들이 행하는 종교적 기도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앞서 잠언서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기도는 오히려 가증할 뿐임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말씀을 떠난 기도는 자기의 욕구만을 드러낼 뿐입니다. 반면에 말씀을 듣는 자의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말씀을 알지 못한 이방인들은 신자의 기도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다윗을 위해 집을 세우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다윗의 자식들이 죄를 범하다 해도 징계는 있을지 언정 은총을 거두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약속에 대해 다윗은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18절)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감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됩니다. 자신의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는 분이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지금껏 알지 못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27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를 위해 집을 세우리라 하신 말씀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았을 때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신자의 기도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앎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풍성하신 은혜, 긍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담은 약속을 가지고 죄인된 인간을 찾아오시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섬기시는 자리에까지 낮아지신 하나님을 알았을 때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정성도 아니고 내 신앙의 덕목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을 알게 된 앎에 의해서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확실케 하옵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의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소원 외에 다른 소원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실컷 말해 놓고 끝에 가서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주십시오’라는 말을 함으로써 스스로 바른 기도를 했다고 여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주십시오’라는 말 한마디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달라’는 말 한마디로 자신의 기도를 옳은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실컷 구하고 나서 아버지의 뜻에 맡긴다는 말 한마디로 자기 욕심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는 정당성을 스스로 갖기를 원하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말 한마디에 속아 넘어가는 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육신과 연결하여 생각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위한 도구로 등장하는 것이지 우리의 육신의 문제, 육신의 일을 하나님의 뜻과 연관하여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다윗을 위해 집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다윗의 자식이 죄를 범해도 은총을 거두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즉 다윗의 자식에게 은총을 거두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은총을 거두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문제를 두고 기도한 후에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옳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육신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의 기도는 자신의 소원, 포부와는 상관없이 다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을 의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5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라고 말하는 것이나 28절에서 ‘말씀이 참되시니이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다윗이 무엇을 의지하고 기도를 하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29절의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는 기도를 보면 다윗은 주 앞에 영원히 있는 것을 참된 복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집에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을 깨달으며 감사하면서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다윗의 집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야 말로 말씀의 성취가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신자는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과 사랑과 자비하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약속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씀에서 자신의 집이 누릴 복을 바라봤다면 신자는 예수님에게서 이미 누리고 있는 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미 주셨고 누리고 있는 은혜와 복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는 자처럼 ‘달라’는 말만 외치는 이방인의 기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29절에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라는 다윗의 기도를 곰곰이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과연 다윗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소원하며 살아가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주 앞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복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은 주의 은혜로만 이루어짐을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다윗의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을 근거하고 은혜를 의지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자신의 정성과 노력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야겠다는 욕구로 가득찬 현대인의 기도와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기도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사람이 스스로 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른 존재입니다. 다들 기도를 안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아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셔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신 그들만이 기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될 뿐입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겠습니까? 그들이 기도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면 굳이 기도를 가르쳐주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단순히 암송할 내용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기도가 어떻게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드러내시는 것이 주님의 기도인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심으로써 제자들이 기도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자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기도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욕심은 그 범위가 없습니다. 이 말은 교회를 향한 욕심도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즉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고 해서 무조건 옳다는 생각은 버리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교회가 쇠약해지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까? 내 교회만은 항상 잘되기를 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교회를 어떻게 사용하실지 우린 알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길로 가게 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에 영원히 거하기를 소원할 뿐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뿐입니다. 신자가 어떤 힘든 길을 가게 된다고 할지라도 신자에게는 영원한 복이 있으며 풍성한 사랑과 자비하심과 은혜로 인해 보호받는 든든한 울타리에 놓여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일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없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