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강) 사무엘하 7:18-24 하나님을 알게 됨

<본문>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영구히 이를 일을 말씀하실 뿐 아니라 주 여호와여 인간의 규례대로 하셨나이다 주 여호와는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주의 말씀을 인하여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러므로 주는 광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참 신이 없음이니이다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을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저희를 위하여 큰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열국과 그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을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 하나님이 되셨나이다(사무엘하 7:18-24)

<설교>

믿음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끌어가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가는 것입니까? 만약 후자라면 인간이 믿음의 주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안믿는 결정권이 인간에게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결국 구원도 인간의 자유의사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생각, 자기 의지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만히 앉아서 신을 섬기는 인간의 정성과 노력에 점수를 매겨서 정성이 갸륵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정성이 부족한 사람은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분명 이런 하나님은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믿음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실력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인간을 찾아오셔서 약속하시고 그 약속대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덕분에 하나님께 불려나와 신자의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아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을 세우시고 그 약속에 따라 다윗의 자식이 죄를 범한다 할지라도 징계를 하실지 언정 사울처럼 은총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다윗의 자식은 참으로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진 존재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연 다윗이 무엇이관대 이러한 놀라운 약속을 하신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다윗의 행위에 대한 대가가 아닙니다. 만약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정성을 칭찬하시면서 약속을 하신 것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정성스런 마음이 얼마든지 부각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정성을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다윗을 위해 집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섬겨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이 인간을 섬기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실제로 하나님이 낮아지셔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섬김 덕분에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의 약속, 섬김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다윗에 부어졌던 은혜와 동일한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약속에 거하고 있고, 하나님의 섬김으로 인해 영원한 나라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놀라운 은혜를 부여받은 여러분에게는 어떠한 반응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고마워서 뭔가 보담을 하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은혜 자체를 소홀히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은혜를 은혜로 보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세상에 대한 일과 생각으로 그 정신이 지배받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신자라면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옳은지를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반응을 통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주어진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보지 못하고 여전히 목을 하늘로 쳐들고 좋은 것을 구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8절을 보면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다윗의 반응입니다.

다윗은 궁에 편안히 거할 때(1절)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고자 하였지만 도리어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집을 세워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자신은 물론 자신의 자식에 이르기까지 견고한 약속위에 세워주심에 대해 ‘내가 누군데 이렇게 대해주십니까?’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을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깊으신 은혜로 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반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으며 하나님의 섬김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과연 다윗과 같은 반응을 나타내며 살아가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러므로 주는 광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참 신이 없음이니이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심을 몰랐겠습니까?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것은 다윗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다 다 인정하고 믿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새삼스럽게 주 외에는 참 신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다윗의 말은 전에는 하나님이 찬 신이라는 것을 단지 들어서 알고 있었던 차원이었지만 이제는 참 신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은 이 고백 이전에도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알고 있었고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다윗이 알고 있던 참 신은 인간의 섬김을 받으시는 신이었고, 인간은 하나님을 정성껏 섬겨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정성으로 하나님의 집을 지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알게 된 하나님은 오히려 인간을 섬기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서 이런 신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과연 어떤 종교가 이런 신에 대해 언급을 합니까?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의 모습, 여기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고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섬겨주면 복주는 신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 역시 이런 신의 속성에 통합하여 생각할 뿐입니다. 결국 우상과 구별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는 하나님이 유일하고 참된 신이시고 너희가 믿는 것은 다 우상이다’는 말을 합니다. 전혀 다르지 않고 구별되지 않는 신을 들고 ‘나의 신이 참되다’고 고집부리는 꼴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으로 알 수 없는 분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종교성에 맞아 떨어지는 분이 아닙니다. 다윗은 이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자신의 섬김을 받으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오히려 자신을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다가오시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견고한 약속 위에 자신은 물론 자신의 자식까지 세우심을 통해서 세상에서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이분이야 말로 참 신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23,24절을 보겠습니다.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을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저희를 위하여 큰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열국과 그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들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을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 하나님이 되셨나이다”라는 이 말에서 생각해 볼 때 다윗이 감사하고 감격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윗의 놀라움, 감사와 감격은 세상 어떤 나라가 이스라엘과 같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시고 영원히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이 일이 세상 어느 나라에 주어졌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에 주어진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아무런 한 것이 없이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축복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다윗에 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항상 ‘주십시오’라는 부르짖음만 되풀이 하고 있는 인생들이 얼마나 가난합니까? 과연 여러분은 어떤 믿음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까?

인간은 멸망 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우리 역시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속하시고 우리를 섬김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세상에 누가 이런 복을 받았습니까? 돈많은 사람들이 부러워 보입니까? 성공한 사람들에 비해 여러분 자신이 초라하게 여겨집니까? 돈을 자랑하고 지위를 자랑하는 자들 앞에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까?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섬김을 외면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나님을 유일신, 참된 신이라고 떠들면 뭐합니까? 세상이 알지 못하는 참 신을 섬기는 자로서의 당당함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돈도 지위도 우습게 보여져야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이것이 참으로 부요한 믿음일 것입니다. 세상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하늘의 복을 자랑하지를 못한다면 우리 스스로 영원한 생명의 복을 복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돈으로 살아가는 세상 앞에서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돈이 전부인줄 알고 사는 인생이 초라하게 보여져야 합니다. 참된 신이신 하나님을 만났고 알게 되었다면 이러한 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윗은 새롭게 계시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버림받고 죽어 마땅한 자에게 오셔서 섬기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섬김을 받고 복을 주는 하나님은 참 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앎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섬김과 복을 받고 우리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내게 이런 복을 주시는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또 복을 받을만한 그런 사람도 못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라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린 너무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까지 우리의 생명을 위해 희생하셨는데, 우린 엉뚱한 것에 관심을 돌리면서 받은 것이 없다고 아우성일 뿐입니다. 불평과 불만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께 어떻게 비춰질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같으면 당장 버려 버리겠는데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은총을 거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러한 신을 세상 어디에서 들을 수 있고 만날 수 있단 말입니까?

세상의 것이 아무리 많이 주어진들 심판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왜들 모르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세상이야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지만, 소위 하나님을 말하고 천국을 말하고 십자가의 구원에 대해 감사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세상의 복을 추구하고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섬겨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 모든 것이 한낱 종교놀이로 비춰질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새롭게 받아야 할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부를 이미 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고 내어 놓으신 것을 받고 누리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에 그러한 대목이 나옵니다. 에베소서 1:17-19절을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의 기도와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십시오.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는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의 생활의 환경과 평안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다만 에베소 성도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마음의 눈을 밝히사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고, 성도 안에서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고,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소망을 알고 영광의 풍성함을 알고 은혜를 아는 이것이 사도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셨고 받은 것을 알게 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도의 이 기도가 오늘 여러분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중요하고 복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중요한 것은 팽개치고 하잘것없고 사도가 배설물로 여기는 것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야 말로 빈약한 신앙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 신자와 같은 존재는 없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풍성한 은혜보다 더 큰 것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은혜를 깊이 깨닫고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과 같은 감격과 감사가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 앎이 여러분의 신앙에 큰 힘과 담대함으로 자리하면서 여러분을 이끌어 갈 것입니다.

신자는 결코 초라한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에 신자와 같은 이가 없습니다. 이 받은 것을 보지 못하고 받고 싶어 하는 가난한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받아 누리는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