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강) 사무엘하 7:13-17 하나님의 약속

<본문>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나단이 이 모든 말씀과 이 모든 묵시대로 다윗에게 고하니라(사무엘하 7:13-17)

<설교>

행동에 있어서는 자신감을 가질 만한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속 중심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신감을 가지거나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나면서부터 부패한 속 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을 보지 않으시고 속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죄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한 죄인입니다. 죄에 있어서만큼은 모두가 동일한 보응을 받아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은 다같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차별을 두고 대하십니다. 공의의 하나님, 공평의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누구는 사랑하시고 누구는 미워하신다고 말합니다. 사랑할만한 사람이기에 사랑하시는 것이라면 이해가 되고 할 말이 없겠는데 속 중심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고 똑같이 부패한 중심에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달리 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13절 끝부분에 보면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는 말씀이 있고, 16절 끝부분에 역시 “영원히 견고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다윗을 위해 이루신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것은 중간에 그 나라가 무너지거나 실패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어떤 상황이나 조건도 하나님이 이루신 나라만큼은 흔들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이해할 때 ‘신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임을 알게 될 것이며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면 분명 그 약속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 이후 자손들의 신앙 상태입니다. 다윗 이후의 자손들이 신앙으로 산다면 몰라도 만약 그들이 잘못된 신앙으로 나아간다면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들의 신앙이 잘못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약속이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앞서 말씀드린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14-15절을 보면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몸에서 날 자식을 어떻게 대하시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들이 죄를 범하면 징계하는 것은 있겠지만 사울처럼 은총을 빼앗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그에게서 은총을 빼앗았습니다. 죄를 지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에게든 똑같이 사울에게처럼 대하셔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울이 죄를 범해 버림을 받았다면 모든 사람 역시 죄를 범한 자는 버리시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의 자손은 만일 죄를 범한다고 해도 징계는 하겠지만 버리시지는 않는다니 그렇다면 사울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사울보다는 다윗을 더 마음에 들어 하신 것입니까? 그래서 다윗 자손에 대해 그러한 약속을 하신 것입니까? 만약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간이 따로 존재한다면 죄인은 죄인이되 다같은 죄인이 아니라는 논리까지 가능해질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를 씁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만 들게 되면 많은 복들이 쏟아질 것으로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무엇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가 있습니까? 속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아주 깨끗한 속 중심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의 행함이 속 중심을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행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속이 깨끗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으로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간이 되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왜 그렇게 대하신 것입니까?

만일 하나님이 사울에게 하시듯 죄를 범할 때마다 은총을 빼앗아 버린다면 폐하여지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집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은 성취되지 못하고 중단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실패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죄를 범해도 징계는 할지언정 은총을 빼앗지 않으시겠다고 하시는 것은 단지 다윗 자손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위한 하나님의 의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이 택하신 것은 다윗을 세워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을 지키고 보호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함이지 다윗이란 한 개인을 위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든 것입니다.

바로 이 문제에서 큰 실수를 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나 한 개인을 위한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존재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만인이 원하는 하나님 상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개인을 위해 존재하시고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윗을 위해 집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 가문의 번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부강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 다윗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입니까? 다윗의 나라는 다윗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뜻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있는 것이고, 이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다윗을 택하시고 영원한 견고한 약속을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다윗 시대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계속되어진 관심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은석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은석교회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겠지만 그것은 나 자신이 예수님보다 교회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증거에 불과할 뿐입니다.

또한 여러분 개인의 생활이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요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관심거리를 하나님께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일하시는가를 면밀히 살피고 하나님의 관심에 우리의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신자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자 한 개인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인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14절에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몸에서 난 자식의 아비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죄를 범한다고 해도 아비는 자식을 징계는 할지언정 버리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아비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아비로서 자식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해주겠다는 차원이 아니라 자식이 어떤 짓을 해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입니다.

히브리서 12:8절에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말합니다. 아들이기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징계입니다. 그러나 사울에게 행하시듯 은총을 빼앗은 것은 없습니다.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징계하시는 것은 영원한 약속에 견고히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다윗과 사울의 다른점이요 신자와 불신자의 다른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는 아들이면서도 아들다운 모습에 머물지 못하는 연약한 우리를 견고히 하는 은혜인 것입니다.

다윗 역시 사울처럼 버림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그도 죄를 범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는 죄는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야를 고의적으로 죽음의 자리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책망할지언정 은총을 거두지 않습니다. 다윗에게 세우신 약속 때문입니다. 이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도, 그리고 모든 신자들이 폐하여지지 않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이루십니다. 인간에게는 그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약속을 훼방하는 쪽으로 행동할 뿐입니다. 그럴때 마다 징계하시고 돌이키시고 고치시면서 약속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때문에 은혜 앞에서는 인간의 그 어떤 공로도 행위도 높일 수 없습니다. 만약 인간의 행위를 높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시 89:30-35절을 보면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치 아니하리로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을 아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 그대로 하나님은 약속에 대해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버리고 규례대로 행치 않고 율례를 파하고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거두지 않고 성실함을 폐하지 않고 언약을 파하지 않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범할 생각을 하지는 않으시겠죠? 죄를 범한 자를 그냥 봐주고 넘어가신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다스리시고 징책하실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자라면 구원에 대해 불안한 마음은 없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어떻게 살아도 벌만 받을 뿐이지 지옥에는 안간다’고 하면서 안심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은혜를 이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 은혜로 시작하였으면 은혜로 마치십시오.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 받은 자로서 뭔가 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이 곧 영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마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하심에 보답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은혜로 구원 얻음을 고백하면서 우리의 모든 행위에 대해 의미를 두지 않고 버리는 것이 은혜를 아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지금의 신자들에게도 그대로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말씀에 머물지 못하고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해도 은총이 거두어지고 폐하여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쁘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를 복된 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버림받아 마땅한 우리가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나올 수 있게 된 근거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삶에 고달픔과 피곤함고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끝까지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