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강) 사무엘하 7:8-12 하나님의 섬김

<본문>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사무엘하 7:8-12)

<설교>

마태복음 20:28절에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섬기기 위해서이며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속자이십니다. 때문에 당연히 섬김을 받아야 할 위치에 있으신 분이지만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세상 질서에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과 신자의 바른 관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으로 우리가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섬김에 대한 보답으로 예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로서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섬김’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섬김’이라는 단어에서 열심과 봉사를 떠올리게 됩니다. 즉 섬김을 행함의 문제와 연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았으니까 이제는 나의 정성과 열심을 다해서 예수님을 섬겨보자’라고 말하면서 결국 교회라는 집단을 섬김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다윗이 하나님의 궤가 휘장에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하나님의 집을 짓고자 하는 것에서도 이같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짓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열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에 대한 일반적 사고방식에서 접근한다면 다윗의 생각은 분명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고, 신에 대한 깊은 정성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덕분에 좋은 집에서 편하게 지내면서 하나님의 궤는 휘장에 방치한 채 두는 것에 비하면 분명 깊은 신앙이며 정성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이런 신앙과 정성과 섬김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7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지금껏 날 위해 집을 건축하라고 명하신 적이 없다고 하시면서 다윗의 섬김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이런 내용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린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 쪽에서 내 식으로, 즉 내 상식과 경험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참된 섬김이 무엇일까?’를 가르침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다윗과 같은 섬김을 많이 강조합니다. 행함이 없으면 아예 섬김으로 간주하지도 않습니다.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잘하고, 기도도 하면서 소위 교회 생활에 충실한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말하지만 과연 이것이 누구를 위한 섬김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17:25절에 보면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이 세상의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셔야 할 만큼 부족한 것이 있으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재벌 집을 방문한다고 합시다. 과연 무엇을 선물로 가져가시겠습니까? 어떤 선물이 재벌을 기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부족함이 없이 누리고 있는 재벌이라면 무엇을 가져간들 그 마음을 기쁘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 기쁘시게 하고 또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입니까?

다윗의 정성과 섬김을 거절하신 하나님은 도리어 다윗에게 무엇인가를 약속하십니다. 그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1절에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다윗의 모든 대적을 물리치시고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집을 짓고자 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하나님은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평안히 살게 했으니까 이제 그 보답을 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8절의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라는 말씀을 보면 다윗의 정성과 섬김을 거절하시면서 오히려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또한 9절에서도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윗의 행위와 상관없이 변함없이 다윗을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11절의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라는 말씀을 보면 집을 짓겠다는 다윗의 의도를 거절하고 도리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시겠다는 약속을 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말씀에서 어떤 하나님을 생각하십니까? 과연 하나님이 인간의 정성과 섬김을 받기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짓고자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예배당을 짓고자 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다만 우리의 생각이고 우리가 원하는 것일 뿐 이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생각은 큰 착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섬김을 받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시는 분으로 존재하십니다. 다윗이 짓고자 하는 집은 거절하시고 도리어 다윗을 위해 집을 짓겠다고 하시는 것에서 이러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다윗을 위해 짓겠다고 하신 집은 건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 가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 가문은 혈통적 가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문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보다 더 위대하고 복된 가문은 있을 수 없음을 생각해 볼 때 다윗은 세상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된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집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이 약속 때문은 다윗이 범죄 했을 때에도 징계는 하셨지만 버리시지는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십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셔서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왔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섬기시는 분이지 섬김을 받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면 과연 무엇으로 섬길 수 있습니까? 죄인된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희생의 자리에 내어 놓으신 하나님 앞에 과연 무엇을 드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것이 돈 몇 푼으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아무리 크고 좋은 예배당을 지어 바친들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며 섬김이 되겠습니까?

현대 교회는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만들어 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정성을 보이는 것인가를 생각하여 교인들에게 그것을 신앙이라고 교육하며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교인을 크게 병들게 하고 신앙이 아닌 종교에 빠뜨리는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거절하고 도리어 다윗을 위해 집을 짓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집을 짓는 것입니까 아니면 집을 지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입니까? 다윗이 할 것은 자신을 위해 집을 짓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그 약속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 말고 과연 다윗이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즉 섬기시는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다윗이 할 일이며 이것을 두고 ‘섬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섬김은 내 쪽에서 하나님을 위해 뭔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총과 은혜에 대해 받아들이며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뭔가 여러분의 상식과 이치에 맞지 않는 말로 들려질 것입니다.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섬김으로 알고 있고 그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는 세상의 질서 안에서 하나님의 섬김을 받아들이고 누리는 것을 섬김이라고 말하니 어떻게 쉽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극히 높으신 분, 하나님이 죄인된 여러분을 섬기기 위해 오셨다는 말은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를 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우린 항상 초라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 있는 그 무엇도 나의 힘과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신 은혜의 열매임을 생각한다면 내 손에 아무리 많은 것이 쥐어져 있다 한들 그것을 내것으로 내어놓을 수 없고 자랑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고 처지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어떤 형편과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높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섬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좋은 집에 모신다고 해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예배당을 지어 예배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예배당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도 영광스럽게 하는 것도 아니란 것입니다.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천막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그곳에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고백이 있고 감사함이 있다면 그곳이야 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필히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길 수도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존재다’라는 것을 깊이 자각할 때 비로소 섬김이 나올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섬김은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악함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을 감사함으로 받아 누림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잘못은 자신이 집을 지어 바침으로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보겠다는 것에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여호와의 것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없어서 마치 하나님이 떠돌아다니고 계신 것처럼 생각하고 송구스러워 하는 그 마음이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악함이고 악마적 사고방식임을 깨닫지 못한 것이 다윗의 잘못이었습니다. 우린 이러한 다윗의 잘못에서 우리의 잘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을 대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서 무한히 베푸시는 분이시지 베풀었으니까 보답하라는 요구를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지 않으셨으니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 요구하실 정도로 우리가 능력이 있고 그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함을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겠다는 다윗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끌어 들이십니다. 약속 안에서 하나님이 약속을 어떻게 성취해 가시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힘과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에 의해 성취되어지는 약속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아는 신자만이 할 수 있는 섬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열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섬김을 보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섬김과 열심과 의지와 능력이 우리를 붙들어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이끌어 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에 우리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쓸데없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나서기보다는 하나님의 섬김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마음 깊이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섬김이 그 심령에 살아있는 신자라면 그에게서 비로소 섬김의 흔적이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섬기러 오신 예수님에게서 섬김을 배우고, 형제를 섬김으로 예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세상 종교는 인간이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섬기는 분으로 존재하십니다. 크신 분이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를 섬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질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작은 자가 크다 일컬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성에 의해 움직이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그 어떤 정성도 하찮은 것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정성을 신앙으로 높이게 되면 결국 여러분의 행함을 높이는 쪽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날마다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의 깊이는 갈수록 얕아지고 나중에는 여러분의 정성과 행위만 남게 될 것입니다.

집을 짓겠다고 하는 다윗의 정성을 거절하고 오히려 다윗을 위해 집을 지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담겨 있습니다. 다윗에게 이미 독생자를 내어 놓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린 그 약속의 성취로 말미암아 어둠의 자식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이라는 빛에 거하는 존재가 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주님의 섬김 덕분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마시고 베푸시고 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섬김으로 누리고 있는 평안이야 말로 신자에게 주어진 복이며 보배임을 깨닫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