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강) 사무엘하 6:16-23 미갈의 조롱

<본문>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예비한 자리에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눠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사무엘하 6:16-23)

<설교>

신자가 ‘복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거나, ‘내가 이런 일을 했으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실꺼야’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복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무지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적이고 착한 일을 부지런히 해야 복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얄팍한 생각이고 계산일뿐이지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방식으로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미 성경을 통해서 얼마든지 확일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오벧에돔의 집에 복이 주어진 것도 바로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내용입니다. 오벧에돔에게는 복의 조건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즉 가드사람 오벧에돔이 복을 받을 어떤 조건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집에 복을 내린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벧에돔의 복은 다만 여호와의 궤가 그 집에 함께했다는 것만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오벧에돔이 법궤를 잘 닦고 정성스럽게 관리를 잘해서 복이 주어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즉 오벧에돔의 행위로 인해 주어진 복이 아니라 다만 언약궤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 주어진 복이라는 것입니다. 언약궤에 뿌려진 제물의 희생의 피로 인해 주어진 복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함께 하는 것만으로 복은 한치의 모자람도 없이 완성품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과 저주는 언약궤를 중심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가 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신다는 것만으로 복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곧 복된 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이와 같은 복의 비밀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항상 복에 대해 목말라하는 모습만 보일 뿐 이미 복이 주어진 자로서 복에 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전혀 부족함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로 충족한 삶에 머물러 있는 신자의 기쁨에 대해 무지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14절에서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해 춤을 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인해서 복과 저주가 주어지는 것으로 알았던 다윗이 행함과 상관없이 언약궤가 함께 함으로 저주에서 벗어나고 복에 거하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았기에 기뻐하며 춤을 추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다시 언약궤를 모셔오기를 망설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복과 저주의 기준을 자신의 행위에 두고 있습니다. 착한 행동을 하면 복을 받고 나쁜 행동을 하면 벌 받는다는 공식과 계산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면서도 이러한 기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하면 복을 받고, 하지 않으면 복은커녕 벌을 받는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말하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못한 모습일 뿐입니다.

18-19절의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눠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는 내용을 보면 다윗은 복의 기쁨을 온 이스라엘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다윗의 기쁨이 컸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기쁨을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춤을 출 정도로 기뻐하는 다윗의 기쁨을 맛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까? 다윗의 기쁨을 맛보고 싶다면 언약궤가 함께 함으로 주어지는 복의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기준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함께 함으로 주어지는 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다윗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기쁨을 조롱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다윗의 아내이며 사울의 딸인 미갈입니다. 16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고 말합니다.

미갈은 왜 다윗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까? 20절의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는 내용을 보면 다윗이 왕의 체통에 맞지 않는 행동을 했다는 것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갈은 그것 때문에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23절).

왕비에게는 자식이 곧 힘입니다. 왕비이면서 자식이 없다는 것은 힘이 전혀 없는 명목상의 왕비로 전락할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그 이름이 계속되지 못함을 뜻합니다. 시편의 말씀대로 자식을 여호와의 기업(시 127:3)으로 이해한다면 미갈에게는 돌아갈 여호와의 기업이 없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미갈에게 돌아갈 하나님의 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갈이 다윗을 조롱한 것이 어떤 면에서 잘못된 것일까요?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춤을 추며 뛰노는 것은 분명 왕의 체통을 잃어버린 행동입니다. 여러분은 대통령이 만약 군중들 앞에서 춤을 추며 뛰논다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무척 서민적이라는 반응도 있겠지만, 아마 대다수는 무엇 때문에 저렇게 기뻐하며 춤을 추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대통령이 체통이 없다, 무게가 없다는 등의 조롱을 하지 않겠습니까? 미갈이 볼 때도 왕으로서의 다윗의 행동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갈이 다윗을 맞으며 했던 20절의 내용은 왕으로서의 체통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책망의 말인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미갈의 잘못됨은 다윗이 누리고 있는 기쁨과 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왕이라는 지위만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절을 보면 다윗은 미갈의 조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지금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합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도 왕일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 앞에서는 피조물이며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복으로 인해 춤을 추고 뛸 정도로 기쁨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왕이라는 지위는 여호와 앞에서는 내세울 수 없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다윗을 택하여 세운 것이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갈은 여호와 앞에서 다윗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 앞에서의 다윗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왕이라는 체통을 지킴으로서 왕으로서 백성들 위에 제대로 군림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런 미갈의 사고방식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자기 체면과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살아갈 것이고 자신을 지키며 자신을 내세우는 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미갈의 사고방식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게 하심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미갈이 다윗이 왕의 체통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자신이 왕비라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왕이 백성들 위에 강력한 힘을 가진 자로 군림할 때 왕비 역시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왕이 백성들에게 무시를 당하면 왕비 역시 무시 받게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미갈은 왕비라는 자신의 위치 때문에 다윗을 조롱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미갈과 다윗의 전혀 다른 생각이 드러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시고 자신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음을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이 왕이 되게 하셨기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미갈은 자신이 어떻게 해서 왕비라는 지위에 있게 되었는가를 잊고 있습니다. 3:13-14절을 보면 다윗은 미갈과 정혼하였다는 이유로 미갈을 데려오라는 조건으로 아브넬과 언약을 합니다. 즉 다윗이 미갈과의 정혼을 기억하여 불러주지 않았으면 미갈은 왕비의 자리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불러준 다윗 앞에서 미갈은 감사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지금 미갈은 다윗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어떻게 해서 왕비가 되었는가를 잊고 있는 이것이 다윗과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인가는 다윗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도 미갈과 같은 잘못된 사고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결과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어떤 지위에서 어떤 일을 하든 그 모두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지위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목사라는 직무 역시 하나님이 부르시고 세우신 것입니다. 이유는 복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목사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일 뿐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모두가 같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서로 만난다면 높고 낮은 자가 있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가 자신의 직무를 이용해 신자들 위에 있고자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미갈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많은 목사들은 목사로서의 체면과 체통을 지키려고 합니다. 목사로서의 체통을 잃으면 교인들이 무시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될 수록 근엄하게 보이려고 하고,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것이 미갈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잊지 말기 바랍니다. 우린 쓸모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택하심을 입고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컬음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의지로 신자 된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 있어서만큼 우리는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사랑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우리는 목사도 장로도 그 무엇도 아니라 오직 은혜 받은 자로 나올 뿐이고 은혜 받은 자로 서로 만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교회 안에서의 높고 낮음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미갈은 다윗이 체통 없이 춤을 춘 것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드러내었다며 조롱합니다. 행동에 의해서 높아지고 낮아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생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상은 체통을 중요시 하는 것입니다. 체통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것도 자신의 높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에게서는 이러한 생각이 사라지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생각해야 합니다. 쓸모없는 내가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으로 인해서 복을 누리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그 무엇도 아니고 다만 은혜 받은 자일뿐이라는 생각이 마음에 살아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신자답게 하는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찌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이말은 비록 자신의 모습이 미갈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눈에는 천하게 보이고, 지금보다 더 낮아져서 더욱 더 천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는 높임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낮아진 자가 높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법칙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낮아짐을 받을 뿐입니다.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는 것이 그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뿐입니다. 이것을 마음 깊이 절감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일 뿐입니다.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 역시 택하심과 부르심의 결과일 뿐입니다. 무엇하나 우리의 공로를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주신 복을 거저 받아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베푸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거추장스런 모든 것을 떨쳐 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세상의 위치와 조건을 가지고 나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아니었다면 비참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던 처지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다윗이 춤을 추며 뛸 정도로 기뻐했던 기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여러분 역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없을 수 없는 기쁨을 말입니다.

우리가 이 기쁨의 자리에서 서로 만나는데 그 자리에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겠습니까? 목사는 설교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한 직무일 뿐입니다. 기쁨의 자리에서 우린 하나님의 자녀로 만날 뿐입니다. 높고 낮음이 없는 관계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이지 않겠습니까? 이 교회를 그리워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