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1:17-27 다윗의 슬픈 노래

<본문>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명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이 일을 가드에도 고하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우로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같이 됨이로다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저희는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저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너의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병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

<설교>

‘자식을 보면 부모를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의 가르침을 받고 성장하는 자식이기에 자연히 자식의 성품과 그 행동을 통해서 부모가 어떤 분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자식이 못되다고 해서 부모 역시 못된 사람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자식이 잘못 행동함으로써 부모에게 그 욕이 돌아간다는 것을 자식의 입장에서는 꼭 염두에 두어야 할 내용일 것입니다.

이처럼 자식이 부모를 나타내고 보여주는 입장에 있다면 신자 역시 하나님을 나타내고 보여주는 입장에 있는 존재로서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즉 신자로서 세상을 살아간다면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신자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세상에 선포하고 드러내는 ‘증거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존재 의미이기 때문에 신자인 여러분은 이 존재성을 잊어버리지 않고 여러분의 삶의 하나하나가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일에 소홀히 한다면 신자로서의 존재 의미를 상실한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신자가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문제만 내어 놓고, 자신의 문제 해결에만 모든 관심을 두고 있다면 과연 어떻게 그리스도의 증거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나의 문제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갈 뿐 그리스도의 증거자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 둔감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의 삶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보여준다는 것에 대해서는 도외시 한 채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세상의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있어야 할 싸움을 포기한 채, 나아가서 아예 그리스도의 군사라는 것 자체를 버린 채 살고 있는 무능력한 신자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책망하는 것이 본문의 다윗의 노래입니다.

본문은 아말렉 사람으로부터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죽음에 애통해 하면서 부르는 ‘다윗의 애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다윗이 사울의 죽음에 대해 이토록 애통해 한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요나단이야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했고 다윗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준 일들이 많았기에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연 애통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죽음에까지 노래를 지어 부를 정도로 애통해 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단순히 다윗의 마음이 좋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넘어가기에는 뭔가 미심쩍다는 생각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다윗이 사울을 죽였다고 자처한 아말렉 사람을 죽인 것은 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귀한 사울을 죽여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구별하여 세운 여호와의 사람을 죽인 것 자체가 여호와를 대적하는 것이었기에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다윗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서 기름 부은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사울의 죽음에 애통해 하는 것은 사울을 향한 마음이라기보다는 여호와를 향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사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울을 세우신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명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활 노래’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활’이라는 것이 무기를 말하는 것임을 생각해 보면 용맹한 군사가 쓰러진 것에 대해 애통하는 노래를 의미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9절 뒤에 보면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두 용사가 쓰러진 것으로 노래하며 애통해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할 문제는 사울이 과연 용사라는 말을 들을만한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사울의 전적으로 보면 전쟁터에 용맹을 드러내고 싸움에서 승리한 내용은커녕 오히려 다윗을 쫓느라고 시간과 힘을 소비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이런 사울을 다윗은 용사로 일컫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단순히 듣기에 좋은 말로 사울을 용사로 불러주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윗을 사울을 실제 용사로 봤던 것입니다. 그리고 용사의 죽음에 대해 애통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애통함의 이유는 다른 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0절에 보면 “이 일을 가드에도 고하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찌어다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는 말을 합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을 가드나 아스글론, 즉 이방인들이 알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의 용사의 죽음의 소식으로 기뻐하며 승리의 노래를 부를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무엇 때문에 이방인들이 승리의 노래 부르는 것을 염려한 것입니까? 그것은 이방인들의 승리의 노래는 하나님에 대한 조롱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3:4절에 보면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의 중심에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마음이 본문에도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다윗의 이러한 마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믿음과 사랑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을 수밖에 없기에 믿게 되는 것이고, 사랑할 수밖에 없기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미 하나님에 의해 붙들렸기 때문에 믿음이 있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데 믿음이 들어와서 믿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는데 사랑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일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깨달았기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긍휼의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이 중심에 계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중심에 계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다. 모든 삶이 하나님 중심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즉 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로 산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로부터 조롱받는 것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다윗은 이것을 애통해 했던 것입니다.

지금 저는 종교적 자존심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고 있는 기독교를 욕하기에 화를 내는 그런 수준의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을 욕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받기에 마음이 아픈 것보다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 나의 행동과 나의 선택이 조롱을 받는 것으로 분노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점을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는 이방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자신의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 원망이 있고 불평이 있을 때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조차 돌보지 않는다는 조롱을 내 스스로 내 뱉고 있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내가 중심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자로 살아갈 때 내가 곧 하나님을 조롱하는 하나님의 원수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 다윗의 마음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서 이방인에게서 하나님이 모독 받는 것으로 애통해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의 문제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윗의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문제를 끄집어내고 그것을 해결해 주기를 원하는 것이 곧 내 스스로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을 가리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문제에서든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인도하실 것임을 믿으면서 담대히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로 세움 받는 하나님의 군사들입니다. 하나님의 용사인 것입니다. 용사로서 용사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용사답게 살아가지 못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방인의 조롱거리로 남게 될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찌어다 저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사울로 인해서 붉은 옷으로 화려하게 입게 되었고 금 노리개를 옷에 장식하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왕을 세우면서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왕을 구한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사울을 슬퍼하며 울라는 것은 결국 왕을 구한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붉은 옷으로 화려하게 입히고 금 노리개로 장식하게 해준 사울이야 말로 왕다운 왕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왕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울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울을 심판하심으로써 사울 개인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사울을 선택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사울은 자신들을 잘살게 해주는 왕이었지만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용사였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슬픔과 다윗의 슬픔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있어서 슬픔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슬퍼하게 합니까?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군사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싸우는 자로 살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는 자로 전락한 나로 인해서 애통해 하고 슬퍼하십니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세상의 것이 주어지지 않는 것으로, 그리고 세상의 것을 잃어버린 것으로 슬퍼하는 것입니까?

27절에 보면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병기가 망하였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을 싸우는 병기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병기는 스스로 싸우지 않습니다. 용사의 손에 붙들려서 사용되어질 뿐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도구가 망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을 받을 수 있는 것이기에 애통해 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군사요 하나님의 의의 병기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시고 세우셔서 병기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6:13절에 보면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여러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전부인 자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존재로 거듭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의를 위한 병기로 새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하나님으로 인해서 슬퍼하고 애통해하기 보다는 세상의 것 때문에 슬퍼하며 애통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과연 여러분의 슬픔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23:28절에 보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시는 예수님을 뒤따르며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을 위해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신앙이란 십자가 지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고난으로 슬퍼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주님이 가신 길을 그들이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장차 자신의 것을 버리지 못해서 주님이 가신 길을 가지 못하는 자신을 두고 슬퍼하고 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신 길을 갈 수 있기를 위해서 울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날 위해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울음, 애통함은 주님 가신 길을 가지 못하는 나를 보고 울어야 합니다. 세상 것을 버리지 못해서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를 외면하는 길로 가는 나에 대해 아파하고 애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의의 병기로 드려져야 할 내가 오히려 죄의 병기로 쓰여지고 있는 것으로 애통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을 믿는 자도 사랑하는 자도 아닙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냥 숨을 쉬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숨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 값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로서 오직 하나님의 이름과 그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