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 사무엘하 6:12-15 다윗의 기쁨

<본문>

혹이 다윗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사무엘하 6:12-15)

<설교>

소위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열심 자체를 나쁜 것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많은 경우 잘못된 열심에 치우쳐 있음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여러분께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열심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나의 일을 이루고 나의 이름을 높이고 나를 자랑하기 위한 열심이 아니라 주님께 순종하기 위한 열심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이러한 열심으로 사셨습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면 ‘한 주간 내가 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굴릴 수도 있습니다. 즉 열심 = 행함이라는 공식을 쉽게 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고질병입니다. 눈에 보인 것으로 모든 것을 확인하려고 하는 고질병 말입니다. 이러한 고질병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복과 저주도 인간의 행함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이 인간의 행함을 따라 주어진다면 복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행함은 기껏해야 착함과 교회에 대한 열심의 범위에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의 행함을 따라 복이 주어지는 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8장을 보면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복을 주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만약 지켜 행하지 못하면 저주가 임할 것임도 말씀합니다. 사실 신자가 28장의 내용에서 주지할 것은 저주에 대한 선포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선포하기 위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겨우 신앙의 모양을 조금 가지고 있는 듯한 행위 몇 가지를 가지고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앙의 모양 조금, 몇 가지를 가지고,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 좋은 일 몇 가지 행하고, 교회 일에 열심을 낸다고 해서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그 의미가 확실시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사랑에서 실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이웃을 사랑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행위를 두고 본다면 저주가 가장 확실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열심이 복을 받는 통로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웃사의 죽음을 통해서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법궤를 붙잡은 것은 웃사의 열심이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열심보다는 자기 생각, 자기 방법, 자기 능력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겠다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웃사의 열심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웃사의 죽음이 분명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 열심이 하나님을 감동케 하고 그 결과로 복이 주어진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착각을 비웃으시는 것이 오벧에돔의 온 집에 복을 주신 일입니다.

웃사의 죽음을 본 다윗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궤를 다윗성으로 메어가기를 즐겨하지 않습니다.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가드가 골리앗의 출신지라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벧에돔은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이 어떤 연유로 해서 이스라엘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오벧에돔은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무시와 멸시를 받는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와의 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기게 된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웃사의 죽음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자기 집으로 옮기는 것을 꺼려했을 것입니다. 다윗조차 다윗성으로 옮기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누가 여호와의 궤를 환영하겠습니까? 때문에 결국 저주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이방인인 오벧에돔의 집을 선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오벧에돔이 여호와의 궤를 자신의 집으로 옮겨 놓는 것을 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령 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스라엘 지역에 거주하는 이방인으로서 그것을 거절하기는 힘들었지 않았겠습니까?

여호와의 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옮겨 놓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집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떨어질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저주 받아 마땅한 이방인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11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고 말씀합니다. 결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상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 것입니다.

오벧에돔은 이방인입니다. 더군다나 그가 여호와의 궤를 위해 무엇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궤가 그 집에 석달을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입니다. 오벧에돔 여호와의 궤를 모신 결과일까요? 하지만 궤를 모시게 된 것은 오벧에돔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시기를 거부할 때 오벧에돔이 나서서 ‘내가 모시겠다’고 자청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윗이 일방적으로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이 주어진 것입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더군다나 저주의 대상이라 여겼던 이방인의 집이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웃사와 대조되는 것입니다.

웃사는 인간의 열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심판입니다. 오벧에돔은 열심은 커녕 하나님을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복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결과로서 어떤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믿음의 결과가 복으로 주어질 것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하는 일이 잘돼야 하고 세상적인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보다는 잘돼야 믿음의 자존심이 세워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믿었고 열심히 일했으니까 복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는 결국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을 했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행한 것이라면 언제나 하나님이 증명되는 것을 우선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신앙의 바른 길을 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웃사의 열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이방인인 오벧에돔의 집에 대한 하나님의 복, 이 모두는 복과 저주에 대한 인간의 계산과 상식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웃사의 죽음을 본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분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일에 열심인 웃사의 죽음에 대한 반발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했는데 왜 이런 일이 있게 합니까?’라는 우리들의 반발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생각이 오벧에돔의 집에 복이 주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혹이 다윗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쌔”라고 말합니다.

웃사의 죽음을 보고 여호와의 궤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가짐으로 궤 옮기기를 중지한 다윗의 생각이 왜 바뀌게 되었을까요? 다윗의 생각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뀌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3-14절을 보면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이해할 수 없는 다윗의 행동은 베 에봇을 입고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는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으며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복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윗이 제사장을 시켜서 제사를 드렸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제사장복인 베 에봇을 입었다는 것을 보면 다윗이 직접 제사를 드린 것이 유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하나님의 규례를 또 다시 어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에 대해 진노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다윗은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에 복이 주어졌다는 것에서 복은 인간의 열심이나 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 인간이 보태야할 행위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완성된 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무작정 아무렇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궤와 연관되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벧에돔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벧에돔은 분명 복을 받을 조건이 전혀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궤가 함께 한다는 것 때문에 복을 받습니다. 인간의 열심, 봉사, 노력을 더해야 주어지는 복이 아닙니다. 다윗은 오벧에돔을 통해서 이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아가서 메어서 운반하게 되어 있는 궤를 새수레에 운반하는 잘못됨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방법과 열심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잘 모셔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악한 것임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시 다윗성으로 옮겨 갈 때는 어깨에 메어서 가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는 제물의 피가 뿌려지는 곳입니다. 제물의 피가 인간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간은 저주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복의 상태이며 그러므로 복의 통로는 곧 제물의 피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된 것 같습니다. 저주 받을 이방인으로 알고 있었던 오벧에돔이 여호와의 궤로 인해 복을 받는 것을 보면서 여호와의 궤의 능력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대신 기쁨이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에봇을 입은 것은 여호와의 궤의 피의 의미와 그 능력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드린 것 역시 제물의 피로써 주어지는 복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다윗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제사장은 제물의 피를 아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완성된 복을 바라보고 감사하는 그가 진정한 제사장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은 제사장만이 입을 수 있는 에봇을 입고 제사를 드린 것이 하나님의 규례를 어긴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15절에 보면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고 말합니다. 다윗과 이스라엘의 기쁨은 여호와의 궤의 비밀을 알게 된 결과입니다. 즉 피의 의미를 알았을 때 기쁨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저주 받을 자가 복에 거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언약궤입니다. 본문이 그 사실을 실제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복과 저주는 우리의 생각과 계산을 따라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점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열심과 정성과 노력이 하늘의 복을 끌어 오는 능력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복은 제물의 피로써 완벽히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제물의 피를 바라보고 믿는 것이야 말로 복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는데 어떻게 여호와의 궤를 멀리 하겠습니까?

이처럼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 복이기 때문에 복을 받은 자의 특징은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하나 자신의 열심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히 은혜에 대한 고백만 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게 됩니다. 애당초 자신의 것이 없기 때문에 내세울 것도 경쟁의 도구로 삼을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피의 의미를 아는 신자입니다.

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되었고 완전케 되었습니다. 우린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고 믿으면 됩니다. 이것이 복에 거하는 것입니다. 저주 받을 오벧에돔의 집에 언약궤로 인하여 복이 주어졌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안다면 저주받을 우리에게 십자가의 피의 은혜로 복이 주어짐에 대해 깨닫게 될 것이고, 그것으로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신앙이란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열심과 노력에 대한 모든 기대를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행하고 노력을 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만 나타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자신이 뭔가 행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뭘 해야 한다는 것보다는 무엇이 신자로 사는 것인가에 마음을 두게 될 것입니다. 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넘치는 복을 받은 자로서의 감사함의 표현인 것입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유능함이 아니고 힘도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십자가는 큰 기쁨으로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