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강) 사무엘하 6:8-11 다윗의 분노

<본문>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사무엘하 6:8-11)

<설교>

여호와의 궤를 수레에 싣고 갈 때 소가 뛰므로 궤가 수레에서 떨어질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 궤를 붙잡은 웃사의 행위를 잘했다고 봐야 할까요 잘못했다고 봐야 할까요?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우리의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거룩한 하나님의 궤가 손상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을 방지한 웃사의 행위는 상을 받을만한 잘한 일로 보여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웃사를 죽이십니다. 이것은 웃사의 행위를 악한 것으로 보셨다는 뜻이 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웃사와 같은 경우에 처했다면 하나님이 하신 일을 고분고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만약 웃사의 행위를 잘한 것으로 본다면 웃사를 치신 하나님의 일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이 이러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 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다윗이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신 일에 대해 분한 마음을 가진 것은 하나님이 웃사를 치신 것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보기에 웃사의 행위는 참으로 잘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윗의 눈에 여호와의 궤를 붙잡는 웃사의 행위가 악한 것으로 보여졌다면 다윗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여호와의 의로우심을 찬양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보기에 웃사는 잘해보려고 궤를 붙잡았을 뿐 하나님께 악을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웃사를 심판하신 하나님에 대해 반발의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드러나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면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제대로 알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웃사를 심판하심으로써 다윗과 온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너는 이러한 신이다. 그런데도 나를 섬기겠느냐?’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자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직까지 자신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궤는 레위 사람이 어깨에 메도록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레에 싣고 운반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는 여호와의 궤를 운반하는 일을 더 소중이 여긴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운반하는 일이 곧 여호와를 섬기고 여호와께 충성하는 것이니 만큼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일을 받아주실 줄로 착각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관점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에게 ‘나는 이러한 신이다’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웃사를 심판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대하는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우리의 관점을 생각하고 계산하기보다는 말씀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분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내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일을 하신 하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감만을 속에 품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옮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 다윗의 마음이라면 지금 다윗은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웃사가 함께 하고 있으며 궤를 옮기는 일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웃사가 궤를 붙잡았다는 것 때문에 심판을 받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궤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놓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며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사실 여호와의 궤가 어디에 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예루살렘에 없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거나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궤가 없어도 이스라엘은 번성했고 다윗 역시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은 다만 상징적인 것일 뿐, 그 일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일 자체를 중요하게 여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것을 좀 더 잘하기 위해서, 즉 여호와의 궤를 좀 더 잘 모시고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수레를 동원한 듯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윗의 관점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관점에서 생각하니 웃사를 심판한 하나님의 처사가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잘하고 있는데 왜 그것을 막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의 이러한 반응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소위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에게 있어서 고쳐져야 할 것은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일 자체를 중요하게 보는 시각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예배당을 짓는 일이 중요합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중요합니까?’ 혹 ‘둘 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곧 여러분의 관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배당 짓는 일을 중요하게 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을 짓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즉 진짜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웃사나 다윗처럼 행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일을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중요하게 보심에도 불구하고 다윗이나 웃사는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일이 중요하고 하나님은 그 일을 기뻐하신다는 생각을 함으로 말미암아 법궤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에 대해서는 소홀히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에 대해 진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중요하게 보실까요? 예배드리는 일입니까? 기도하는 일입니까? 예배당을 짓는 일입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이 일에 부지런했던 이스라엘을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서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사야 선지자에 대해 분노합니다. 자기들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이사야 선지자의 책망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히 힘써 제사하고 기도하고 제물을 바치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선지자의 책망은 단지 이스라엘을 분노하게 한 것으로 그쳤던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오류는 자기 관점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진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보지를 못합니다. 중요하지 않는 것을 붙드는 대신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해버립니다. 이것은 다만 인간의 열심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웃사가 그렇지 않습니까? 또한 다윗이 그렇지 않습니까? 웃사는 여호와의 궤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에 대해서는 소홀히 한 채 궤를 운반해야 한다는 열심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열심에 대해 경고하시기 위해 웃사를 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무엇을 중요하게 보십니까? 무엇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보십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짓는 일에 열심을 낸다고 해서 그것이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증거는 아닙니다.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열심을 내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증거가 아닙니다. 말씀이 그 심령의 중심에 있다면 그 사람은 언제나 말씀으로 책망을 받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 자신의 실체를 계속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어야 할 연약한 자임을 알게 될 것이고 그 마음은 형제를 향해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비판하지 않을 것이고, 비교하지 않을 것이고, 자랑하지 않을 것이고, 무시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말씀이 그 중심에 존재하는 증거이며 하나님은 이것으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제 말에 다른 오해를 갖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배당을 짓고자 하는 바램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된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보고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신앙의 중심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웃사처럼, 다윗처럼 정작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여기고 중요하지 않는 것에 열심을 냄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길을 가게 될 수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는 교회에 대한 인간의 열심으로 인해 성도가 서로 다투고 불화하는 경우를 많이 목격했습니다. 성경은 교회에 대한 인간의 열심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체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체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깨뜨리면서까지 교회에 대한 인간의 열심을 이루고자 한다면 이것이 곧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자기 관점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열심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9,10절을 보면 하나님의 일에 분한 마음을 가진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것을 포기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 놓게 됩니다.

다윗은 왜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것을 포기했을까요? 그것은 다윗이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몰랐기 때문입니다. 도와주고 지켜주고 보호하시는 하나님만을 생각했지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생각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웃사를 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여호와의 궤를 모시는 것이 곧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모시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부담을 가진 다윗은 궤 옮기는 것을 즐겨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윗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 해도 모시기를 기뻐했겠습니까?

많은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자신에게 유리하고 좋은 것만을 보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나를 도와주고 지켜주고 보호해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가 친한 친구를 만나는 그런 관계는 아닙니다.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서 죽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만나는 현장이 희희덕 거리는 웃음만 있겠습니까? 우리의 악함 때문에 독생자 예수님을 주게 하셨는데 여전히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에 대해 진노하시고 심판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감사와 기쁨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자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을 만난 그가 바로 진정한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라면 자기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보겠다고 나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한 것에 대해 탄식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 열심을 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우리 관점에 머물러 있는 잘못된 신앙입니다. 이러한 자기 관점을 버리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바른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모셔오는 일 자체를 가지고 기뻐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웃사를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이 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열심도, 행함도 모두 깨어지고 죽음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신자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