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강) 사무엘하 6:6-7 웃사의 죽음

<본문>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 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사무엘하 6:6-7)

<설교>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외하십니까? 경외하신다면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 분입니다. 보이지 않으신 분을 어떻게 경외하고 계십니까? 일단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다. 그렇다면 나는 보이지 않는 분을 지금껏 어떻게 경외하고 살아왔는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 물음에서 주저하신다면 여러분은 어쩌면 무엇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가를 모르면서 다만 스스로 경외한다고 여기는 것이 전부였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소경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식으로 하나님을 경외 또는 섬겼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로 나타납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은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했다면 그것은 선지자를 어떻게 대접하는 가로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비록 그들을 심판하고 책망하는 것이라 해도 그 말씀에서 자신들의 죄를 발견하고 또한 말씀을 가지고 자신들에게 온 선지자를 높이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보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에 대해 분노하면서 선지자를 핍박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대접하는 가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증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책망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분노하여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것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형식과 의식을 동원해서 경외하는 척 했을 뿐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 분명히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으라거나 성경책을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경험에 맞지 않다 하더라도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생각과 상식에 맞도록 성경의 의미를 고쳐가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고 은혜를 구하고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 기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우리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기분좋게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살필 것은 과연 말씀이 바른가 바르지 않는가이지 나를 기분 좋게 해주는가 기분 나쁘게 하는가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나를 기분 좋게 해주는 것만을 말씀으로 인정하고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하나님보다 자신이 중심되어 있는 것이고, 이러한 잘못됨이 결국 자기 방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나서는 결과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방식을 요구하십니다. 또한 목적이 선하기 때문에 과정이 조금 잘못되었다고 해서 봐주고 넘어가는 것은 하나님께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철저히 말씀을 기준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가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모셔오는 내용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것은 이스라엘의 왕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윗과 온 이스라엘은 여러 가지 악기로 여호와 앞에 주악하면서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처럼 즐거운 일에 심각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궤를 실은 수레를 몰던 소가 갑자기 뛰므로 인해서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붙들게 되고 웃사는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게 된 것입니다.

웃사는 나쁜 의도로 하나님의 궤를 붙들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소가 뛰므로 인해서 하나님의 궤가 땅으로 굴러 떨어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 붙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웃사의 행위는 분명 선한 의도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궤는 아무나 붙들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황이 웃사로 하여금 하나님의 궤를 붙들 수밖에 없도록 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 생각에는 웃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너무 심했다는 반발로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내 자신의 일이 아니라 다만 성경에 기록된 인물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웃사의 일이 여러분 자신의 일로 다가온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하나님 이것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6,7절을 보면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고 말합니다. 웃사의 잘못은 하나님의 궤를 붙든 것에 있습니다. 그의 의도가 어떻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 됩니다. 법궤는 아무나 만질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이해하십니까? 비록 웃사의 의도가 선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나 만질 수 없도록 되어 있는 법궤를 만졌다면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사실은 여러분의 삶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아무리 선하고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면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웃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은 철저히 인간의 방식은 거부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일은 그 시작부터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길 때는 레위인이 그 궤를 메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한 레위인이라고 해서 모두 멜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핫 자손만이 메는 일을 하였습니다(민 7:9). 그래서 고핫 자손에게는 성전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 다른 자손과는 달리 소와 수레를 배정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수레에 실어서 모셔오고 있는 것입니다.

역대상 13:1절에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장수로 더불어 의논하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역대상 13장의 내용이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본문의 내용과 같은 것임을 생각해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모셔올 때 장수들과 의논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하나님의 궤를 모시는 방법을 두고 의논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의논을 한 결과가 수레에 싣고 옮기는 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레위 자손이 메도록 되어 있는 법궤를 소가 끄는 수레에 싣고 옮기는 새로운 방법을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왜 메지 않고 수레에 싣는 방법을 동원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메는 것보다 수레에 싣는 것이 더 안전하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은 자기들의 방식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궤를 옮기겠다는 그 의도는 선하고 좋았지만 결국 궤를 옮기는 방법에 인간의 방식을 개입시킨 것이 문제였고 하나님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으심을 웃사에 대한 진노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웃사가 법궤를 만진 것은 어떤 잘못이 숨어 있을까요? 이것은 이 질문으로 그 내막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수레에서 떨어질 뻔한 법궤를 웃사가 붙들어서 무사했다면 그것을 본 사람들은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웃사가 아니었다면 법궤가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웃사가 아니었다면’ 이 말이 사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이 일하심에 대한 도전적인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웃사에 대한 진노는 하나님이 일하심에 대해 인간은 끼어 들 수 없음을 선포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 인간이 협력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에 지장이 있다는 사고방식을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럼 인간은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냐? 인간이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의 일이 제대로 되겠는가?’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는 자신들이 열심히 봉사하고 일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이 되어지고 있다고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웃사가 법궤를 붙든 것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사고방식에 대해 진노하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붙든 것은 ‘내가 붙들지 않으면 궤가 굴러 떨어지겠다’는 다급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하지만 이 행동이야 말로 하나님이 살아서 일하신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즉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인정치 않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뭔가 반발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궤가 굴러 떨어지는 것을 그냥 두고 봐야 한단 말인가?’라는 반발 말입니다. 이 생각에는 ‘하나님의 궤 굴러 떨어지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만 있을 뿐 ‘굴러 떨어지든 무사하든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나는 다만 말씀에 순종할 뿐이다’는 생각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렇게 되면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즉 우리들의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뜻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 버립니다. 자신이 원한대로 되어지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좀 더 나은 것,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궁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효과적으로 예배드릴 수 있을까?’라는 궁리를 하면서 끊임없이 인간의 방법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효과적인 인간의 방식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비록 하나님의 방식이 미련하게 보인다 해도 그대로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에 다른 것을 덧붙이거나 삭제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은 것을 교회가 제멋대로 요구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발전시키는데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해서 말씀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서 교인들에게 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이 만든 방법을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위장해서 가르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심판을 쌓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신앙의 원리입니다. 성경을 벗어나 살면서 바른 신앙의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성경이 말씀하지 않은 인간의 방식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보다 더 높이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일치한다는 것 하나로 성경으로 인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맞기에 신뢰해 버리는 것입니다.

효과적인 방법이고 합리적인 것이라고 해서 성경에 추가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제아무리 불편부당한 말씀이고 방법이라고 해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신자의 본문이고 도리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가령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처럼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실제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는 길을 갔습니다. 일부러 미움을 받기 위해 행동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길을 가다보니 미움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움을 받는 길은 전도를 위해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전도를 위해서는 어떻게든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높임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게 칭찬을 받아야 전도에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전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다는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종일뿐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지시 받은 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지시를 내리시는가를 살피면서 지시된 그 길을 가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하면 안되는데’라는 생각은 우리들의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이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자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할 일은 오직 말씀을 살피면서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효과적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생각하기를 즐겨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수레 만드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인간의 생각과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여 신자에게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새로운 방법, 독창적인 방법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고정되어진 형식, 의식,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 낸 방법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효과적이라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보다 인간이 고안해낸 방법을 의지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웃사의 죽음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이 좌정하신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해보겠다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대한 도전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 역시 살아계신 하나님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시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미리 가지고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결론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내리신 결론에 순종하는 것만이 신자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말고 여러분자신의 수레를 만드는 것을 중지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만든 수레로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오히려 진노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