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 사무엘하 6:1-5 하나님의 궤

<본문>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삼만을 다시 모으고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저희가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행하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사무엘하 6:1-5)

<설교>

영생에 관심을 두고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에 살아있어야 할 귀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들의 속마음을 그 부자 청년을 통해서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에게서 엿볼 수 있는 우리의 실체는 우리는 자신의 것을 버리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의 문제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자신 있었지만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실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행위와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의 행위란 믿음에 의해 나오는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행위는 자신의 손해가 없는 행위입니다. 나의 손해, 내 희생, 나의 포기가 들어 있지 않은 거짓된 행위일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나를 포기하게 합니다. 버리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행위에는 자신의 포기와 버림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버림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한 믿음은 오히려 자신의 세력을 더욱 탄탄히 구축하는 수단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현대인들이 말하는 믿음에 이러한 믿음이 많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 아닐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믿음을 보기 힘든 세대에서 과연 나의 믿음은 어떤 것인가를 살펴야 할 것이고, 참된 믿음으로 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 본대로 이스라엘은 남쪽 북쪽 모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있습니다. 나라가 통일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국력은 더욱 왕성해졌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다윗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정복하지 못한 예루살렘을 쳐서 여부스 족속을 몰아냄으로써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에 두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공격해 오는 강대국인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승리하게 됩니다. 블레셋을 이겼다는 것은 그야 말로 주변의 나라들에게 이스라엘의 위상을 크게 알리는 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블레셋은 강대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왕이 된 후 이스라엘은 날이면 날마다 왕성해져 갑니다. 이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다윗의 성공’이라고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성공은 발전과 번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대인은 이런 성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가 추구하는 부흥 역시 발전과 성장입니다. 이 발전과 성장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교회의 모든 것이 발전과 성장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흔히 말하는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이러한 슬로건은 내 교회가 교회답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일 뿐, 정작 모든 관심은 하나님과 말씀으로부터 벗어나 발전과 성장으로 치닫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은 발전과 성장을 복으로 인정합니다. 복을 양적인 팽창의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단의 세력에 붙들려 있는 세상의 정신이고 사고방식인 것이지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은 양적인 팽창 의미로 말씀되지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배당을 짓고, 교인 수가 늘어가는 것을 ‘복’으로 말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인간의 종교일 뿐임을 말씀드립니다

어떻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지금 다윗은 발전과 성장의 탄탄대로에 서 있습니다. 소위 잘나가는 왕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다윗이 복 받았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만약 이스라엘의 발전이 다윗의 복이라면 다윗이 더 이상 추구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받은 복으로 감사하면서 마음껏 누리며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찾아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삼만을 다시 모으고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가져오는 것은 단순히 거룩한 물품을 집에 모셔 놓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5절의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것은 다윗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왜 하나님의 궤를 모셔 오기를 열망했겠습니까? 법궤를 모셔 와야 복을 받아서 더욱 큰 나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사울의 수준일 뿐입니다. 사울은 법궤를 모셔옴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것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는 전혀 상관없이 다만 법궤만 있으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지금도 복을 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의 태도를 하나님께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는 상관없이 열심히 하는 모습만 보여주면 하나님도 정성에 감복하셔서 소원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과연 다윗에게 이런 의도가 있었겠습니까? 다윗은 복을 위해 법궤를 모셔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궤가 무엇이고 다윗은 왜 그것을 모셔 와야 했는가? 입니다. 출애굽기 25:22절에 보면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궤 앞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는 말씀을 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만남의 장소가 하나님의 궤인 것입니다. 그러면 만남의 장소를 다른 것으로 변경할 수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만남에 요구되는 것은 거룩인데, 인간은 본질적으로 거룩과는 상관없는 부정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궤입니다. 하나님의 궤의 뚜껑에 피가 뿌려짐으로써 죄를 용서 받고 비로소 깨끗한 자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속죄소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궤는 곧 하나님의 다스림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궤를 다윗 성에 모셔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궤를 모셔오는 이유입니다.

즉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으면서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만이 참된 왕이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궤를 모셔올 때 지은 시로 볼 수 있는 시 24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 24:7-10절을 보면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모시면서 이런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왕은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만방에 선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윗 왕국은 다윗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다스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할 존재로 세워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오직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이스라엘에게 뭔가를 보여야 할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이 문제에서 실패한 사람입니다. 사울은 자신을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여겼던 사람인 것입니다.

이 내용을 교회에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단 교회를 다스리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고 주님이 교회를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교회의 머리로 인정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궤를 교회에 모셔 놓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교회에 목사와 장로가 있다 하더라도 그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심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목사와 장로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인간의 욕심을 집어넣으면 안됩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교회를 보게 되면 성장과 발전만이 교회가 살 길이라고 여겨지게 됩니다.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 교회가 복을 받은 증거라고 여기게 될 것이고 성령의 역사라고 믿게 될 것입니다. 결국 말씀과 상관없는 교회로 전락될 뿐입니다.

발전과 성장은 세상이 추구하는 목표일뿐입니다.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교회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두고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해 교회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관심을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무엇을 기뻐하시는가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하나님이 내 관심거리에 눈을 돌려주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우상의 수준으로 여기는 것일 뿐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것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와 다름을 보여줄 수 있는 길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다윗의 기쁨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로 굳게 세워짐을 바라봄으로써 누리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기쁨을 원하고 살아갑니까?

다시 말하지만 다윗은 이스라엘의 발전을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 궤를 모셔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삶의 영역을 더욱 든든히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남들이 넘볼 수 없는 나의 삶을 구축하기 위해 하나님의 지원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신앙을 남발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옛날에 엿이 먹고 싶어서 멀쩡한 고무신을 엿장수에게 갖다 주고 엿을 바꾸는 것처럼 세상 것 때문에 예수를 팔아먹는 것이 너무 많은 이 세대 안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신자의 이름을 버리지 않고 사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나의 세계를 이루기 위한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 앞에 나온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궤에 뿌려진 피를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순종은 그리스도를 피를 믿고 피를 증거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다윗의 마음이 오늘 우리의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를 원하는 다윗의 믿음이 오늘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원하고 추구하는 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대신 그 자리에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굳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