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사무엘하 5:17-25 다윗의 전투

<본문>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요해처로 나가니라 블레셋 사람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단정코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저희를 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 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칭하니라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 종자들이 치우니라 블레셋 사람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온대 가라사대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동작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사무엘하 5:17-25)

<설교>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블레셋이 이를 경계하게 됩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일로 인해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한 예로 다윗이 사울을 피하기 위해 블레셋으로 거짓 망명을 했을 때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군대를 모집하면서 블레셋 왕이었던 아기스가 다윗에게도 함께 전투에 참여할 것을 종용한 바가 있습니다(삼상 28:1). 그때 다윗은 할 수 없이 아기스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아기스와 함께 나아갔을 때 블레셋의 방백들은 다윗이 자신들의 대적이 될 것을 두려워하면서 다윗과 함께 가기를 거부한 것입니다(삼상 29:3-4). 그들은 다윗을 극도로 경계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고 하자 이스라엘이 다윗으로 인해 강대국이 되고 자신들을 위협하는 존재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아직 힘이 없을 때 침공하려는 계략으로 다윗을 찾아온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다윗의 입장이라면 어떤 조치를 취하겠습니까? 블레셋과 맞서 싸우기 위해 모든 군사를 모으고 전투를 준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여호와께 물은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단정코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전투입니다. 군사를 모으거나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요청을 하는 것이 아니라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갈까요? 말까요?’를 묻는 것입니다.

사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올라온 상황에서 블레셋과 맞붙어 싸우는 것은 기정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판단을 먼저 내렸다면 하나님께 ‘블레셋 사람에게 올라갈까요? 말까요?’를 묻는 것이 아니라 블레셋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지금껏 그런 식으로 해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면에서 다윗은 우리에게 신앙의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 갈것인가를 묻는 것은 블레셋과 싸울 것인가 말것인가의 문제까지도 자신의 소관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블레셋이 공격을 하는 사태를 해결하는 것은 다윗 자신의 소관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블레셋이 공경을 해 왔으니 나가 싸워서 이스라엘을 지켜야 한다는 자기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물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을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지 않은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판단과 생각이 항상 살아있습니다. 그 판단과 생각은 언제나 나에게 유리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행동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당연한 것을 두고 하나님께 묻기보다는 당연한 것이기에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블레셋을 치는 일은 다윗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블레셋을 치고 승리한 것은 다윗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입니다. 인간의 힘은 전혀 개입된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거하게 됩니다. 이때도 다윗은 여호와께 묻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온대 가라사대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동작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23-24절)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신앙이 어떠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물어서 전투함으로 블레셋에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하나의 경험으로 남을 수 있는 사건입니다. 승리의 경험입니다. 경험은 자신감을 갖게 합니다. 승리의 경험이 있다면 또 다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감은 하나님께 묻는 것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의 승리로 인해 자신감을 가질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블레셋이 침략 했을 때는 한번 이겼으니 또 다시 이길 자신이 있다는 생각으로 나가 싸울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블레셋이 두 번째 침략을 했을 때도 하나님께 묻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승리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전투에서의 승리를 철저히 하나님이 행하신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높으신 생각과 계획에 의해 이 세상이 움직여지고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의생각과 판단으로 결정하고 행할 문제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이 다윗에게 답하시듯 우리에게도 답하실 때를 기다리라는 것입니까? 그전까지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사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께 물어도 다윗에게 답하신 것처럼 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답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여러분은 뭔가 풀리지 않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에서 여러분이 기대하고 원하는 답은 전혀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무슨 일을 새롭게 시작하려고 할 때 ‘하나님 이 일을 시작할까요 말까요’라고 물었다고 합시다. 여기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성경에는 그러한 식의 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가직 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신자에게는 개인의 삶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척 어려운 문제이지만 신자는 이 문제를 두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물으면 전투를 한 것은 다윗 자신의 삶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물어서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행동하겠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생각과 판단대로 행동하는 자신의 삶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만의 삶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고, 또 남들보다 더 잘되고 윤택한 삶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이처럼 자기만의 삶이 있기에 하나님께 와서도 자신의 삶을 위해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이것을 해주세요’라는 요청식의 기도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가는 이 길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는 것입니까?’라는 물음을 보이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전투는 하나님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기고 하나님이 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과 이스라엘의 그 승리를 맛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리에 다윗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없었으면 블레셋에게 승리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윗이든 누구든 하나님의 승리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을 두고 말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 흔히 하는 말은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일하신다면 인간이 없다면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역할은 하나님이 일하셨음을 온 천하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 인간의 역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을 때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도하셨음을 높이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은혜의 나라입니다. 은혜의 나라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감을 증거하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된 자의 역할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셨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일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겠는가라는 생각은 교만입니다. 인간의 가치를 높이려는 사단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여호와이십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 인간이 거든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셨을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묻는 것이 곧 이러한 사고방식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묻는 것은 내 힘과 내 의지와 내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서 일하고 계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의지대로 모든 일을 성취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여호와께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나아온 모든 인생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호와께 묻는 자세보다는 나의 경험과 자신감을 가지고 모든 일을 행하여 왔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다윗이 여호와께 묻는 것을 통해서 삶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인생이 나의 것이 아님을 인지하시고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삶에는 염려와 걱정이 없습니다.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기대하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 순종하게 해달라는 마음으로 바라보기에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에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은 참으로 가볍습니다. 짐이 없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결국 염려와 걱정이 끊이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짐으로 다가오는 것은 자신의 계획과 포부를 이루기 위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안되어지기에 실망이 되고 낙심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의 삶에 손해가 올 것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께 묻는 믿음이 아닙니다.

여호와께 묻는 것은 단순히 답을 얻겠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해결책을 얻기 위해 묻는 것이 아니라 내 소관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물음도 블레셋과 싸우든 싸우지 않던 모든 소관은 여호와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내 뜻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내 힘으로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내 힘으로 했다는 착각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무엇 하나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신 것이 없음을 깨달으시고 되어진 일에서, 또는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은 일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신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이것이 믿음의 모습입니다.

아무런 계획도 뜻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된 뜻이며 계획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묻는 것이며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된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