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강) 사무엘하 5:6-10 다윗성

<본문>

왕과 그 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거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저희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다윗이 그 산성에 거하여 다윗 성이라 이름하고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사무엘하 5:6-10)

<설교>

남자가 여자를 선택하거나 여자가 남자를 선택할 때 상대방이 못나고 볼품없고 가난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설사 못나고 볼품없는 자인데도 불구하고 사랑해서 선택했다 할지라도 그 사랑이 계속 지속된다는 것도 사실 보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세상의 상식을 뛰어넘는 선택의 방식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7: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를 그들이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수효가 적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숫자적으로 이스라엘이 가장 적은 수의 민족이었음을 의미하기보다는 그만큼 다른 민족에 비해 이스라엘은 약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는 무엇 때문에 가장 약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입니까? 여기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의 가장 이스라엘다운 모습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강한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강할 때 세상은 머리를 조아리고 굴복할 것이고, 그러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굴복한 것이며 그것으로 영광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강한 자에게 굴복한다면 그것은 힘에 대한 굴복일 뿐이지 사람에 대한 굴복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힘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일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장 약한 이스라엘을 택하셨다는 것은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겠다는 의도입니다. 즉 약자가 강자에 대해 승리하는 것을 통해서 여호와의 존재를 증거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살아가는 이스라엘이라면 어떤 승리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힘을 드러내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약자일 뿐입니다. 그러한 약자가 하나님 덕분에 존재하고 있음을 하는 것이 가장 이스라엘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여호와께 대적하는 속성은 스스로의 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8:16-17절을 보면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이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호와께서 참으로 싫어하는 것은 ‘내 능력과 내 힘으로 이 재물을 얻었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세상의 속성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악함의 드러내기 위해 세움 받은 것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힘으로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는 나라이며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 가장 이스라엘다운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언제나 자신들은 참으로 연약한 존재임을 잊지 않아야 했던 것입니다.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도 그들은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높여야 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며 오늘날 교회이고 신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세상에서 힘 되는 것을 구한다면 그것은 교회로서의 역할을 망각하고 교회됨을 벗어 버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강자가 아니라 약자의 나라임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 그들에게서 보여 지는 것은 자신들의 연약함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면 그는 분명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임을 고백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라면 자신에게 있는 것을 힘으로 삼아 누군가를 무시하고 조롱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이 가장 먼저 행한 것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것은 온 이스라엘의 중심지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다윗이 있는 헤브론은 남쪽에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중심지로는 적합지가 않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중심지로 삼기 위해 예루살렘을 공격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로부터 사울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실패했던 일이 바로 예루살렘에 있는 여부스 거민을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시온 혹은 여부스는 예루살렘 북쪽의 낮은 지대에 위치한 현대의 시온산이 아니라 남쪽에 있는 가장 높은 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북쪽 부분은 점령하였으나 남쪽의 여부스 거민의 지역은 점령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인 가나안 땅 정복에 있어서 아직까지 온전히 순종치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부스 사람들을 치려고 할 때 그들은 다윗을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6절)는 말로 조롱을 합니다. 다윗을 소경과 절뚝발이도 이길 수 없는 약한 자로 보는 것과 동시에 자신들은 소경과 절뚝발이를 내세워서 전투를 해도 다윗쯤은 이길 수 있다는 교만의 말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물리쳐 왔던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들을 쳐서 물리치고 그 성을 다윗성이라고 이름하게 됩니다. 반면에 10절을 보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는 말로써 다윗이 의해 쫓겨나게 된 여부스 사람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강함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결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함께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3:1절을 보면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다윗의 편을 들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다윗의 편을 드시며 다윗을 강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셨다는 것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에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만한 어떤 선한 조건이 있었는가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다윗에게 선택을 받을만한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세워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시고자 하신 것이고 그것을 위해 다윗을 강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강성케 하시는 것은 다윗 개인을 강한 자로 만드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12절을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을 삼으신 것과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아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슨 위대한 일을 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성을 알기에 위대하다고 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과 실체를 바로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바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앎이 다윗을 교만으로 나아가지를 않도록 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강성을 자기 개인의 강함으로 보지를 않았습니다. 자신을 왕으로 세우시고 강하게 하시는 것은 모두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원하는 것입니까? 혹시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자신이 강성하게 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나를 도우시고 잘되게 하시는 것으로 오해함으로써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원하는 이것이 바로 현대 교회의 오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나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써 그 인생이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편하고 잘사는 쪽으로 되어진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그에게는 언약까지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붙들려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길로 가야만 했습니다. 야곱에게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경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그 인생을 험악한 나그네 인생의 길로 끌고 가셨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뜻대로 인생을 이루어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신 야곱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험악한 나그네 길로 이끌어 가신 것입니다.

여부스 사람이 거하던 예루살렘은 이제 다윗에 의해 점령당하고 다윗 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던 가나안 사람들이 난공불락이라고 생각했던 요새였습니다. 소경과 절뚝발이를 내세워서 싸워도 다윗은 이길 수 있다고 큰소리쳤던 그곳이 힘없이 무너지고 하나님이 선택한 다윗 왕의 처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전이 세워지는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바로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마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고 내세웁니다. 은혜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산다고 큰소리칩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해 단단한 요새와 같은 완악함을 보이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마음 상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부르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의 그 완악한 마음을 점령하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완악한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점령을 당하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자리하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참된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여부스 사람들이 자랑하는 단단한 요새와도 같습니다. 그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을 강퍅과 완고함과 고집으로 뭉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비록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은혜의 부름을 받은 신자로는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값없는 은혜로 인한 감사함과 기쁨 역시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세상에서 강해지고 힘있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욕심에 거하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상태의 신자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의 심령이 예수님의 값없으신 은혜에 의해 점령당하고 예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처소로 거듭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어디에서나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낼 수 있는 은혜의 증거자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8절 하반절에 보면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한 소경과 절뚝발이는 여부스 사람들이 말한 것과 같은 의미로 생각한다면 그들의 교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집을 다윗 집으로 이해해 본다면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는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집에 용납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이런 교만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든 ‘내가 했다’는 이 완악함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값없는 은혜로 나의 완고함 심령이 점령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리스도의 은혜로 내 심령이 점령당하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써 내 심령을 다스리고 완악함을 무너뜨려 주시기를 원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여부스 사람을 공격하여 그곳을 다윗성으로 삼은 것처럼 하나님이 단단한 내 심령을 깨뜨리시고 점령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처소로 되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사모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점령당한 그 심령이야 말로 참으로 복된 심령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