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사무엘하 3:31-39 다윗의 지도력

<본문>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통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서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가로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착고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석양에 뭇 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해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의 한 바가 아닌 줄을 아니라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방백이요 또는 대인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사무엘하 3:31-39)

<설교>

지난 시간에는 동생의 복수를 위해 아브넬을 헤브론성에서 죽인 요압이 다윗으로부터 저주를 받는 내용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요압의 행위에 대해 저주를 한 것은 단순히 살인죄에 대한 저주라기보다는 헤브론 성, 즉 도피성에서의 악한 행동에 대한 저주였습니다. 도피성은 살인자가 피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도록 규례를 세워 놓으신 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살인자까지도 살리시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인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도피성 규례를 통하여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피성에서의 복수 행위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부인한다는 것은 말로써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외치는 것만이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입술로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나 그 행위가 입술의 고백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니까 나는 예수를 믿는 신자다’고 여기고 안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입술의 고백은 있지만 그 행위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에 대한 고백과 함께 모든 것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정신에 부합된 길을 가야합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내 스스로 나의 고백을 뒤집는 삶을 반복할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끊임없이 나 자신이 요압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경계해야 할 것이고 살피며 점검하는 삶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증인으로 부름 받은 신자로서 증인다운 삶을 위해서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에 부합된 길을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자 자신이 말씀에 의해서 다스림 받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나를 다스리고 지배하는 삶이 되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의 뜻과 고집을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39절에 보면 다윗은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실찌로다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왕 다윗도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요압의 형제가 강한 세력을 가진 자로 군림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말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신하입니다. 그런데 아브넬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환송해준 다윗을 찾아와서 다윗의 어리석음을 말하면서 불평을 하는 것을 보면 요압은 자신의 힘과 세력을 믿고 다윗에 대해서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대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넬이 이스라엘의 왕인 이스보셋을 대하는 태도와는 같지 않았을지라도 왕에 대해 경시하는 마음은 있었다고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감히 왕에게 그러한 태도를 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나도 힘이 있다’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오랜 세월 다윗과 함께 하면서 그를 도와줬다는 자신의 공로가 앞섰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요압은 다윗에게 순순히 복종하는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따라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이었다면 요압도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환송하여 보내준 아브넬을 다시 붙잡아서 죽인다는 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과도 같은 것인데 다윗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어찌 그런 악행을 스스럼없이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을 두고 다윗의 지도력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까요? 왕이 왕다운 강력한 지도력을 보이지를 못하고 약한 모습을 보여주니까 신하인 요압이 다윗에 대해 불평을 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였다고 판단해도 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을 이방 국가와 같은 존재로 본다면 다윗의 지도력을 문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대통령의 지도력에 대해 많은 문제를 삼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방나라와 다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은 힘으로 존재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존재 방식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하고 은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방 나라는 힘의 나라입니다. 힘으로 존재하고 힘있는 자가 군림하도록 되어 있는 힘이 질서인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방 나라는 힘있는 자를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힘은 오직 힘에 대해서만 굴복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방나라의 왕은 강력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힘으로 힘을 통제하고 다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역시 힘이 질서인 힘의 나라입니다. 힘이 국가를 통치하기 때문에 강력한 지도력이 없는 대통령에 대해서는 요압과 같은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이스라엘은 힘의 나라가 아니라 은혜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고 있음을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을 드러내어야 할 나라로 세워진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 두고 있었던 것이지 이스라엘을 자신의 소유화하여 지배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던 것입니다.

요압이 아브넬을 죽였을 때 다윗은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28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혹 요압의 죄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염려하여 발뺌을 하는 의도의 말이 아니라 항상 여호와 앞에서 무죄한 자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다윗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즉 다윗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말인 것입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살려준 것 역시 항상 여호와 앞에서 무죄한 자로 살기를 힘쓰는 다윗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즉 지도자는 강력한 통치력을 가진 힘있는 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왕이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국가이며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서의 왕의 역할은 백성들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도하고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현 사회에서 말하고 요구하는 지도자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카리스마’라는 말을 들어왔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카리스마가 있다’는 말을 많이 하고 있는데, 어떤 단체든 그 단체를 이끌기 위해서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카리스마’라는 말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카리스마’란 용어는 본래 기독교적 용어로서 ‘은혜’ ‘무상의 선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거두어 가지 않는 하나님의 선물을 뜻하기도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저 베푸신 은총의 선물을 뜻하기도 하는 말입니다. 즉 성령의 특별한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생활하는 모든 신자들에게는 ‘카리스마’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용어를 독일의 사회과학자인 M.베버라는 사람이 사회과학의 개념으로 확립시켜 버린 것입니다. 즉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뛰어난 재능이나 힘을 이렇게 부름으로써 카리스마를 뛰어나고 힘있는 자에 대한 복종의 의미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서 은연중 타인을 압도하는 듯한 느낌이 주어질 때 그를 ‘카리스마’있는 사람으로 말하면서 스스로 그에게 복종하는 자세를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도자에게 카리스마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역시 다를 바 없습니다. 현대 교회는 교회의 목회자에 대해서도 ‘카리스마’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강한 지도력으로 교회를 이끌어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질서가 있고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에서 목회자란 교인들의 중심적 위치에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위치에 있는 목회자가 연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목회자에 대한 복종보다는 무시가 나오게 될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요압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외적으로 보면 교회가 질서가 없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현대 사회가 이해하는 그러한 카리스마적인 힘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을 권력으로 복종케 하고 강포로 다스리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은 오직 ‘나와 내 나라’즉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무죄하기를 힘썼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지배 법칙인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을 나타내기에 힘썼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스라엘에 요압 같은 자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요압은 도피성에서 복수를 행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지 않은 사람입니다. 모든 일을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힘으로 사는 사람은 약자에 대해서는 자신의 힘을 내세우려고 하고, 강자에 대해서는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악행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힘없는 약한 자인 다윗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힘없는 약한 왕이라고 해서 무시하면서 마음껏 불평하고 복수의 감정을 드러내며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요압이 문제입니까?

왕이기 때문에 강력한 통치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는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강력한 통치력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강한 통치력이 없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경우에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에게 제어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윗처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것은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면 사울을 살려준 다윗의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중심이 있지 않다면 자신을 해하려고 하는 사울을 죽이지 않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단지 사람 좋은 다윗으로만 보여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브넬을 환대하고 보내준 것은 둘로 나누어진 나라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세워지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즉 아브넬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우선되어졌기에 아브넬을 환대하고 돌려보낸 것일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요압은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먼저 앞세운 것입니다. 아브넬과의 감정적 관계에서 다윗의 행위를 보니 불평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다윗에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따라 행동하는 요압은 참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압과 같은 존재가 오늘날 교회 내에도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욕망과 감정과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그들이 참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요압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말씀이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관심사가 아니기에 교회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에 대해서도 복종할 의도를 전혀 갖지 않고 있습니다.

목사의 말이 복음을 기초로 한 것이라면 그 말에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주인 되신 예수께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의 말이 복음에 일치되는 것인가에는 상관없이 다만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불평을 하고 반대를 한다면 그것이 곧 요압 같은 모습이고 이러한 사람은 참으로 제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만나는 관계가 유지될 때 교회다움이 증거 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윗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넬이 죽은 사건으로 인해 백성들이 혹 자신을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요압과 백성들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통하라고 지시한 후에 아브넬을 장사하고 그를 위해 애가를 지어 부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음식을 권했을 때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35절)고 하자 다윗의 진심을 알게 된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의 한 바가 아닌 줄을 아니라”(36-37절)고 하게 된 것입니다. 온 백성이 다윗의 마음을 알게 되고 그를 신뢰하고 그의 말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며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목사는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무죄하다’는 다윗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순전한 교회로 세워지기를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이것이 중심이 되어 서로 신뢰하는 관계로 굳게 설 때 말씀 안에서 만나는 관계가 되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때로 어려운 것은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운 요압과 같은 존재가 있을 때입니다. 말씀에 복종하기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그들은 참으로 어렵다 할 수 있습니다. 목사의 지도력은 힘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과 긍휼이 그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목사의 카리스마이고 여러분의 카리스마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약해보인다고 해서 무시한 것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지 않습니까? 세상적으로는 약한 모습의 예수님이셨지만 우리는 그분 앞에서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잘난 것이 전혀 없는 악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강력한 통치력으로 여러분을 제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이런 신자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존재로 살아가는가는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될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제어하는 강력한 힘은 오직 복음뿐입니다. 복음에 의해 제어 받고 살아가는 그가 곧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신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