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 사무엘하 3:27-30 다윗의 저주


<본문>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종용히 말하려는 듯이 저를 데리고 성문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를 인함이더라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 아비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문둥병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핍절한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저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사무엘하 3:27-30)



<설교>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에는 그를 세우셔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드러내시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의해 세움 받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마음이 어떠한지를 조금이나마 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인물의 행위에는 세상의 통속적인 생각이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보여집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의 행동 역시 한 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9절을 보면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 아비의 온 집으로 돌아갈찌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문둥병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핍절한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찌로다 하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다윗이 요압을 저주하는 말로써 그 저주는 요압의 가문 전체의 몰락을 의미하는 아주 심한 저주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저주를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과 요압의 인간적인 깊은 관계 때문입니다. 먼저 개인적으로 보자면 요압은 다윗의 자매인 스루야의 아들입니다(대상 2:15-16). 즉 다윗의 조카로서 혈육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의 칼을 피하여 떠돌아 다닐 때 오랜 세월을 다윗과 함께 하면서 다윗을 도왔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적 관계에서 보자면 요압은 멀리 할 수 없고 저주 또한 할 수 없는 친분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요압을 다윗이 크게 저주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을 우리에게 증거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요압을 저주하는 것은 곧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저주하신다’를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내용은 우리에게는 매우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압 같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압이 무엇 때문에 저주받았는가를 안다면 하나님께 저주 받을 자가 누군가를 알 수 있을 것이고, 그것으로 매일 우리 자신을 살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요압이 다윗에게 저주를 받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의 배경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아브넬이 다윗을 찾아와서 이스라엘을 다윗에게 바칠테니까 자신과 언약해 달라고 한 내용에 대해 기억할 것입니다. 아브넬은 이스보셋과 사울이 속해있던 배냐민 지파의 장로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면서 설득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다시 다윗을 찾아왔을 때 다윗은 아브넬과 함께 온 사람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면서 호의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넬은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치고 돌아오게 되고, 다윗이 아브넬이 왔을 때 그를 후히 대접하고 돌려보낸 일에 대해 듣게 됩니다. 그러자 요압은 다윗을 찾아가서 “어찌 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늘 어찌하여 저를 보내어 잘 가게 하셨나이까 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의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왕의 출입하는 것을 알고 모든 하시는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24,25절)는 말을 합니다. 그 내용을 보면 아브넬을 그냥 보내 것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아브넬을 대접하고 그냥 보낸 것에 대해 요압이 불만을 보인 것은 아브넬이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것에 대한 감정 때문입니다. 결국 요압은 아브넬에 대한 복수심을 참지를 못하고 사자들을 보내어 아브넬을 데리고 오게 하여 헤브론 성문으로 데리고 가서 그의 배를 찔러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다윗이 듣고 요압을 저주하게 된 것입니다.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것은 아사헬에 대한 복수심이 담겨 있습니다. 30절에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저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는 말씀에서 그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내용은 단순히 복수를 금지하는 내용일까요? 그리고 다윗이 요압을 저주하는 것은 ‘누구든 복수하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 것입니까?

물론 성경은 복수를 금지 합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복수를 금지하는가에 대해 알지 못하면 이것은 단지 도덕으로 흘러가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다윗이 요압에 대해 저주하는 것은 요압의 행위가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요압처럼 하면 저주받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압처럼’이라는 말이 요압의 복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만약 ‘복수하면 저주 받는다’는 주장이 되버리면 항상 복수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버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초점은 ‘헤브론’이라는 성에 있습니다. 요압은 아브넬을 헤브론으로 데리고 와서 그 성문에서 죽였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저주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21:13절에 보면 “제사장 아론 자손에게 준 것은 살인자의 도피성 헤브론과 그 들이요”라고 말합니다. 즉 아브넬을 죽인 헤브론 성은 여호수아가 아론 자손에게 준 ‘도피성’이었던 것입니다.

도피성이 어떤 성인지 기억하십니까? 민수기 35장에는 도피성에 대한 규례가 나와 있습니다. 도피성은 살인자를 위한 성입니다. 하나님은 살인한 자가 도피성으로 피했을 때 그 누구도 복수할 수 없는 규례를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민 35:25-28절에 보면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 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 그러나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 피하였던 도피성 지경 밖에 나갔다 하자 피를 보수하는 자가 도피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지라도 위하여 피 흘린 죄가 없나니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유하였을 것임이라 대제사장의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의 산업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즉 살인자는 도피성에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보호를 받을 수 있고 죽은 후에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헤브론 성은 그 누구도 복수를 행할 수 없는 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자신의 동생을 죽인 것에 대한 복수를 헤브론 성에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에게 저주를 받는 이유이며, 따라서 누구든 도피성에서 복수를 행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도피성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선포하기 위해 세워진 성입니다. 비록 살인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 아래서는 그의 모든 죄가 가려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피성을 이스라엘의 곳곳에 세워 놓으신 것은 이스라엘의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있음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의 복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도 도피성에서 말입니다. 이것은 요압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모른다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모른다면 그는 결국 저주 아래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것입니다. 긍휼을 말하고 자비를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 아래 모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여러분께 도피성으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여러분의 관계에서 없어야 하는 것은 복수입니다. 나에게 해를 입힌 자에 대한 복수, 미움, 시기 이러한 것은 예수 안에서는 용납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해를 입힌 여러분 자신들이 예수님의 희생과 섬김과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복수심으로 산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과 긍휼을 모른다는 것이 되고 사랑과 긍휼을 모른다면 그는 저주 아래 있는 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복수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멸시하는 그는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22절에 보면 “마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 저주를 받는가?’라는 물음을 이 말씀을 토대로 답을 내려 본다면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물어야 할 것은 ‘주를 사랑하십니까?’입니다. 이 물음에서 우리 자신을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것을 교회에 대한 봉사나, 종교적인 열심히 이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잘못된 이해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전혀 잘못된 믿음에서 헤매게 되고 쓸데없는 집을 지고 허덕이는 경우가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를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희생과 섬김, 사랑과 긍휼로 인해서 멸망에 처해야 할 내가 생명을 얻게 된 것에 감사하는 그것이야 말로 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에 대한 감사가 이론과 관념으로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있음이 형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 사랑 역시 형제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베푸는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형제 사랑은 긍휼과 자비로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긍휼과 자비로 만나기에 미움이 없고, 시기가 없고, 복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최고의 형제 사랑입니다. 그런데 복수가 있고 미움이 있다면 그것은 곧 주를 사랑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저주받는다는 것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것은 수직적인 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주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음을 생각한다면 이웃은 주님에 대한 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알게 해주는 중요한 존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형제에 대해 복수심을 가지고 미워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인간을 미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아래 있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신앙의 삶에 중요한 가르침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다윗의 저주는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은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원수에 불과한 우리가 받을 수 없는 큰 사랑과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가슴에 생명으로 살아있다면 여러분에게서는 사랑과 긍휼이 나와야 합니다. 사랑과 긍휼이 이웃을 향해 전해져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서 ‘누가 저주를 받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시면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아래 있는 자답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