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강) 요한일서 5:16-17 형제를 위한 기도

<본문>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요한일서 5:16-17)

<설교>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그의 뜻대로 하는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씀에 대해 살펴봤지만,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의 뜻대로’를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는 조건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 응답을 위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내 뜻이 없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내 스스로 나의 뜻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내 뜻이 없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되었을 때 자연히 포기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앎의 관계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씀 드린 것입니다.

삶의 과정 속에서 세상을 내가 원하고 내가 마음먹은 대로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따라 이끌려 가고 있음을 알게 될 때, 그런 하나님 앞에서 내 뜻을 내세운다는 것 자체가 허망한 일임을 알게 되었을 때 자연히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기를 소원하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하는 기도야 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16-17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는 형제를 위해 구할 것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 내용에서 여러분이 궁금한 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가 무엇인가? 에 있을 것입니다.

사도는 모든 불의가 죄라고 말합니다. 즉 불법을 행하는 모든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5-6절에서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되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으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없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살아가는 모든 것이 불의며 죄지만 그 죄를 우리를 사망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신 예수님의 은혜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라는 것은 죄가 사망에 이르는 것과 이르지 아니하는 두 종류로 구분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살아가는 성도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망에 이르는 죄는 무엇입니까? 같은 죄라 할지라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그는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가 없게 되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이 사실을 믿지 않는 모든 자들이 곧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시도는 이들을 위해 구하라고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형제를 위한 기도를 말하면서 형제 관계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불의를 행하며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관계에 있는 것을 형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든 그리스도의 은혜를 멸시하거나 믿지 않는 자는 형제가 아닌 것이 됩니다.

형제란 비판과 경쟁과 멸시의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형제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불의에는 양이 없습니다. 어떤 행동을 얼마큼 했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인간을 불의를 행한 자로 판단합니다. 그 속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죄없다고 선언 받은 은혜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형제입니다.

누구 하나 잘난 것이 없고, 누가 누구보다 더 의롭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는 누군가의 불의함이 보인다고 해도 그것을 두고 비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판할 자격이 없거니와 매가 그를 비판한다면 나 또한 비판을 받아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는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날 도우시듯 형제를 도와주시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연약함에 하나님이 힘이 되어주시듯 형제의 연약함에 하나님이 힘이 되어주시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말씀으로 산다고 자신할 분이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래서 말씀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가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은 다만 은혜로 가능할 뿐이며, 수시로 내 속의 악한 본성이 은혜를 거슬러 나타나고 있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일하게 이러한 연약함에 놓여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내가 나의 약함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면, 형제를 바라볼 때도 그의 약함을 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제의 넘어짐이 보인다면 그 형제를 보면서 나 또한 넘어지는 자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에서 비판을 절대 나올 수 없습니다. 비판이 나온다면 그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넘어지는 자를 비판한다면 그는 자신의 넘어짐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자신의 넘어짐을 보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형제를 위해 어떤 기도를 하십니까? 형제를 위한 기도가 전혀 없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을 향한 기도 없이 살아가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나에 대한 기도가 없기에 형제에 대한 기도의 필요성을 갖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한다고 해도 혹 육신의 문제, 즉 ‘형제의 사업이 번창하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로만 채워져 있다면 그것은 나의 관심 자체가 육신을 향하여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나에 대한 관심이 생명의 문제를 향해 있다면 형제를 위해 기도할 때도 그의 생명의 문제를 두고 기도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란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옳습니다. 나의 불의함과 연약함에서 형제를 바라볼 때 형제는 비판과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은혜를 서로 나누고 교제할 대상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형제에게서 원하는 것은 없고, 다만 함께 은혜 안에 살기를 원하는 것만 있을 것입니다.